Sunday, November 27, 2011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원래 노블리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브리제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노블리스 오블리제"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리스)만큼 의무(오블리제)를 다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로마 귀족의 절제된 행동과 납세의 의무를 다하는 모범적 생활은 평민들에게 귀감이 되어 국가천년을 지탱하는데 초석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국가에 사재를 헌납하고 솔선수범하여 전장에 나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 때 영국의 왕자 엔드류는 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죽을 수 있다는 지도층의 책임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 저명인사나 소위 상류계층의 병역기피, 뇌물수수 탈세 부동산 투기 등이 매우 오래된 병폐로 잔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조대왕 당시 흉년으로 인한 기근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던 제주도 사람들을 위해 전 재산으로 쌀을 사서 분배한 거상 김만덕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역사적 사례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우리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은 서양의 지도층 인사들의 행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 "노블리스 오블리제" 대신에 비슷한 뜻으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로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 바른 본을 보여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이루어 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지도층이 꾸정물을 만들어 내어 우리 사회를 온통 진흙탕 속을 만들어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과 재산이 많은 재력가들이 이제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나가야 할 때입니다. 권력은 누가 준것이며그 재산형성은 누가 가능케 한것입니까? 국민을 위해 겸손한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소비자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만큼 누리고 있으면 그만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영국의 왕자 앤드류, 조선시대의 김만덕 처럼 지도층의 인사들이 사회적, 국가적 의무를 다하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갈 때 선진국 대열에 들어 설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제사 지내기 문제 - 종교로 인한 제사 갈등

종교로 인한 제사 갈등

李 星 宰

미국 북가주분원장/공학박사

예수를 믿는 사람은 부모도 없니? 어떻게 조상님 제사를 안 모셔! 어릴 때 개신교를 믿는 친구에게 던진 말이다.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나보다 더 착하고 바르게 살 것이라는 나이브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거부하고 조상님 제사를 모시는 것을 비판하는 개신교 목사나 신자를 보면 정말 그들은 예수를 믿기 전에 가까이 있는 자신의 부모도 모르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교나 불교, 천도교 등은 말 할 것도 없지만 예수를 믿는 천주교 신자들도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제례형식과 절차가 서로 조금씩 다르겠지만 조상님을 공경하는 근본정신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을 것이다. 유난히 개신교 목사들은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를 비판하고 그로인해 신자들 집안에서는 제사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금년도 벌써 11, 머지않아 양력 음력 설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조상을 기리고 부모를 섬기는 미풍양속의 제사가 어디서부터 문제가 되었고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를 짚어보았다.

먼저 조상님의 넋을 기리는 미풍양속의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님을 알아야한다. 제사는 조상숭배와 효도의 가치를 통해 국가와 민족의 근간인 가정을 바로 세움에 목적이 있으며 가정이 바로 서야 건전한 사회와 나라가 선다는 유교의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제사를 통해 부모를 잊지 않음이 인간사회의 윤리도덕임을 가르치고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숭조돈종의 정신과 우애를 나누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사는 오래전 무속신앙 시절부터 있었다.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유교이념이 이 땅에 자리 잡은 이후부터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제사를 우상숭배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한 우상이란 단순히 타종교나 조형물이 아닌 내 자신에 스며든 그릇된 신앙적 교만과 배타성임을 알아야한다. 종교의 벽을 넘어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는 편협한 믿음이 우상일 것이다. 종교예식에도 전례형식과 절차가 있듯이 제사를 모시는데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지 나의 종교의식은 받아드리면서 제사전례는 미신으로 생각하는 모순을 범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유교의 우주론에 입각해 설정된 어동육서나 홍동백서의 원리를 모르는 것은 나의 잘못이지 그 전례 자체가 문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유교나 불교에서 가르치는 조상숭배와 효도정신은 기독교의 십계명에 나오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개신교나 다른 여러 종교단체가 상호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열린 자세를 잃게 되면 그 신앙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자신의 가슴을 찌르게 될 것이며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욕보이는 행동일 것이다. 또한 효도정신과 조상숭배의 미풍양속을 꼭 종교적인 개념으로 해석해야만 하는지도 생각해볼 일로 믿어진다.

종교의 전례나 절차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고 있다. 제사의 예절도 꼭 유교형식을 따라야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사의 의미를 명심하면서 변화에 맞게 보완해 나갔으면 좋겠다. 제사는 어디까지나 조상을 기리는 행사이지 나를 기준으로 내가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독실한 불교신자이신 어머님의 제사에 사진 한 장을 달랑 놓고 절도 올리지 않고 알렐루야를 외치며 노래하는 것이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고인의 넋을 불편하게 만들고 가족 전체의 평화와 화목을 가져올 수 없는 제사는 오히려 망자와 생존자들 간의 불화만 가져올 뿐이다.

제사의 전례절차를 바꾸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위선 자식이면 다 균등하게 부모님의 유산을 물러 받는 요즈음 장남이나 아들만이 제사를 모셔야 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빠르게 변하고 있는 현대 물질문명사회에서 종교나 철학과 이념이 다양화 된 가족들끼리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제사전례를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돌아가신 분의 넋을 편히 모시는 태두리 안에서 변화를 모색해야함을 재삼 말해두는 바이다.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도 어려운 한문축문보다는 조상님의 이력과 넋을 기리는 우리말 축문은 가슴에 와 닿을 것으로 느껴진다. 조상님의 사진과 지방, 축문이나 기도문, 그리고 절을 올리는 것과 기도를 겸용하거나 대체하는 것은 효도와 조상숭배의 기본 태두리 안에서 가족들의 화목을 가져올 수 있는 합의점을 찾으면 될 것이다.

<효령대군19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