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3, 2021

계유정난과 기계부정 의 낙향

계유정난과 기계부정 의 낙향

1950년은 6.25 전쟁이 발발 해이다. 이전만 해도 우리집안에는 순탄하게 지내왔으나 혹독한 시련은 이해부터 시작 되였다. 악몽 같은 인공치하 3개월은 9.28 수복으로 종말을 했으나 계속 2 가뭄으로 벼농사를 지을 없으니 당장 식구들이 끼니를 걱정 정도로 악화 되였다.

이해에 수리조합 의물을 있는 논을 팔아서 문전옥답 이라고 봉섭의논자리 천수답을 샀으니 비가 금방 쏘다질듯 하다가 빗방울 뿌리고 마는 일이 2 연속 되였고 거기에다 큰누나 결혼 시켰지 나의 대학 진학은 엄두도 냈다. 지금도 하늘을 처다보고 한숨만 쉬던 때를 잊을수 없다.

1960 중반에 미국 유학길에 올은후 San Francisco 에서 버스를 타고 Kansas 3 거처 학교타운 까지 가는 도중에 Nebraska 에서 Kansas 까지 광활한 벌판에 뿌려지는 물을 보고 너무나 딴세상 같아서 당시 하늘을 보고 한숨만 쉬던 고국을 생가하면 하늘과 차이라고나 할가 부럽기 한이 없었다. 5~6월이 되면 우리 본가가 모내기를 했는지 걱정을 하니 동료학생이 말하기를 미국까지 와서 고국에 비가와서 모내기를 했는지 걱정 하는 사람 처음 보겠네 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하늘만 처다 보고 사는 신세가 되였는가 생각하게 되고 우리 족보사를 떠드러 보니 실마리가 완전이 아니나 풀리기 시작 했다.

대림도정의 아들이신 기계부정 (, 효전, 16대조부) 백파도정의 아들이신 옥계도정 (,현돈) 함께 남하하시였는데 종형이신 백파도정은 지금 연산으로 정착 하시고 기계부정은 성산면 산곡리로 정착 하게 되였는데 이유는 종친중에서 사육신들과 동문수학하고 학식이 있으니 수양대군이 단종복위세력인 종친들을 무마하기 위하여 벼슬을 시켜줄려고 호출을 자꾸 하니 난처하게 되었다.

옥계도정은 농맹아로 자처하고 기계부정은 정신이상자를 거짓 흉내 내시다가 단종이 죽게되니 충신은 이군을 섬기지 않는다고 두사촌 형제가 야반도주를 해서 옥게도정은 연산에 남고 기게부정은 성산면산곡리로 운둔생활이 시작 되였다. 옥계도정은 처가가 연산에 있기때문에 그곳에 정착 하시고 기계부정은 어떤 연고로 성산면 산곡리 오시게 되였는지 족보에 기록이 없어서 궁금하기 이없다.

아버지 묘비 문을 보면 기계부정의 아버지 이신 대림도정 묘를 안양 미군기지 내에서 찾아서 산곡리로 이장 하신거로 기록을 보면 기계부정 께서 안양근처에 사셨던겄으로 추정 된다 당시 기계부정 게서 남하를  하시였으면 후손들이 안양 근처에서 거주하였을 텐데 지금 부동산 시가로 치면 하늘와  차일  으로 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유정난() 1453(계유년), 후에 세조로 즉위하는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 문종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단종 폐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장자 승계 원칙을 무시한 정통성과 능력도 부족하고 업적도 없는 막내 아들 이방석 세자로 삼은 문제라고 들고 일어나서 어느 정도 반란을 일으킬 명분은 있었던 무인정사,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 권좌에서 몰아내야 된다는 아주 확실한 정치적인 명분이 있었던 중종반정, 집권 이후는 막장이지만 적어도 반정 당시에는 폐모살제 실정을 일삼은 광해군 몰아내야 한다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던 인조반정과는 달리, 계유정난은 단종 정통성도 완벽하고 폭정이나 실정을 일삼은 적도 없었는데다가 어쨌든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으로서 단종을 보호하는 입장에 있던 신하들을 죽이고 단종 귀양보냈다가 끝내 죽였기[7] 때문에 반정을 정당화할 명분이 없었다.

특히 당시는 조선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성리학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후였기 때문에 많은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세조 정통성은 이후 조선의 기득권을 잡게 되는 사림 세력에게 비판을 받게 된다. 연산군  무오사화 원인으로 걸린 조의제문 결국 문제에서 파생되었다.

'
정난' 政亂(정계의 혼란) 아닌 靖難(난리를 안정시킴)인데, 일단 김종서 황보인안평대군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을 수양대군이 역쿠데타로 수습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조금 확실한 의미와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수양대군의 명분이 없는 쿠데타"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돌이켜 바르게 한다는 의미의 반정(反正)이라고까지 미화되지 않은 것은, 중종반정 직전의 연산군 인조반정 직전의 광해군 곧바로 끌어내려진 것과는 달리 단종은 후일 사육신 실패로 인해 노산군으로 강봉되기는 하였어도 쿠데타 직후에는 끌어내려지지 않고 임금으로서 수양대군에게 양위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