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27, 2011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원래 노블리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브리제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노블리스 오블리제"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리스)만큼 의무(오블리제)를 다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로마 귀족의 절제된 행동과 납세의 의무를 다하는 모범적 생활은 평민들에게 귀감이 되어 국가천년을 지탱하는데 초석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국가에 사재를 헌납하고 솔선수범하여 전장에 나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 때 영국의 왕자 엔드류는 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죽을 수 있다는 지도층의 책임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 저명인사나 소위 상류계층의 병역기피, 뇌물수수 탈세 부동산 투기 등이 매우 오래된 병폐로 잔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조대왕 당시 흉년으로 인한 기근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던 제주도 사람들을 위해 전 재산으로 쌀을 사서 분배한 거상 김만덕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역사적 사례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우리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은 서양의 지도층 인사들의 행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 "노블리스 오블리제" 대신에 비슷한 뜻으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로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 바른 본을 보여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이루어 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지도층이 꾸정물을 만들어 내어 우리 사회를 온통 진흙탕 속을 만들어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과 재산이 많은 재력가들이 이제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나가야 할 때입니다. 권력은 누가 준것이며그 재산형성은 누가 가능케 한것입니까? 국민을 위해 겸손한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소비자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만큼 누리고 있으면 그만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영국의 왕자 앤드류, 조선시대의 김만덕 처럼 지도층의 인사들이 사회적, 국가적 의무를 다하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갈 때 선진국 대열에 들어 설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제사 지내기 문제 - 종교로 인한 제사 갈등

종교로 인한 제사 갈등

李 星 宰

미국 북가주분원장/공학박사

예수를 믿는 사람은 부모도 없니? 어떻게 조상님 제사를 안 모셔! 어릴 때 개신교를 믿는 친구에게 던진 말이다.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나보다 더 착하고 바르게 살 것이라는 나이브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거부하고 조상님 제사를 모시는 것을 비판하는 개신교 목사나 신자를 보면 정말 그들은 예수를 믿기 전에 가까이 있는 자신의 부모도 모르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교나 불교, 천도교 등은 말 할 것도 없지만 예수를 믿는 천주교 신자들도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제례형식과 절차가 서로 조금씩 다르겠지만 조상님을 공경하는 근본정신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을 것이다. 유난히 개신교 목사들은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를 비판하고 그로인해 신자들 집안에서는 제사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금년도 벌써 11, 머지않아 양력 음력 설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조상을 기리고 부모를 섬기는 미풍양속의 제사가 어디서부터 문제가 되었고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를 짚어보았다.

먼저 조상님의 넋을 기리는 미풍양속의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님을 알아야한다. 제사는 조상숭배와 효도의 가치를 통해 국가와 민족의 근간인 가정을 바로 세움에 목적이 있으며 가정이 바로 서야 건전한 사회와 나라가 선다는 유교의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제사를 통해 부모를 잊지 않음이 인간사회의 윤리도덕임을 가르치고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숭조돈종의 정신과 우애를 나누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사는 오래전 무속신앙 시절부터 있었다.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유교이념이 이 땅에 자리 잡은 이후부터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제사를 우상숭배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한 우상이란 단순히 타종교나 조형물이 아닌 내 자신에 스며든 그릇된 신앙적 교만과 배타성임을 알아야한다. 종교의 벽을 넘어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는 편협한 믿음이 우상일 것이다. 종교예식에도 전례형식과 절차가 있듯이 제사를 모시는데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지 나의 종교의식은 받아드리면서 제사전례는 미신으로 생각하는 모순을 범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유교의 우주론에 입각해 설정된 어동육서나 홍동백서의 원리를 모르는 것은 나의 잘못이지 그 전례 자체가 문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유교나 불교에서 가르치는 조상숭배와 효도정신은 기독교의 십계명에 나오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개신교나 다른 여러 종교단체가 상호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열린 자세를 잃게 되면 그 신앙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자신의 가슴을 찌르게 될 것이며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욕보이는 행동일 것이다. 또한 효도정신과 조상숭배의 미풍양속을 꼭 종교적인 개념으로 해석해야만 하는지도 생각해볼 일로 믿어진다.

종교의 전례나 절차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고 있다. 제사의 예절도 꼭 유교형식을 따라야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사의 의미를 명심하면서 변화에 맞게 보완해 나갔으면 좋겠다. 제사는 어디까지나 조상을 기리는 행사이지 나를 기준으로 내가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독실한 불교신자이신 어머님의 제사에 사진 한 장을 달랑 놓고 절도 올리지 않고 알렐루야를 외치며 노래하는 것이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고인의 넋을 불편하게 만들고 가족 전체의 평화와 화목을 가져올 수 없는 제사는 오히려 망자와 생존자들 간의 불화만 가져올 뿐이다.

제사의 전례절차를 바꾸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위선 자식이면 다 균등하게 부모님의 유산을 물러 받는 요즈음 장남이나 아들만이 제사를 모셔야 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빠르게 변하고 있는 현대 물질문명사회에서 종교나 철학과 이념이 다양화 된 가족들끼리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제사전례를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돌아가신 분의 넋을 편히 모시는 태두리 안에서 변화를 모색해야함을 재삼 말해두는 바이다.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도 어려운 한문축문보다는 조상님의 이력과 넋을 기리는 우리말 축문은 가슴에 와 닿을 것으로 느껴진다. 조상님의 사진과 지방, 축문이나 기도문, 그리고 절을 올리는 것과 기도를 겸용하거나 대체하는 것은 효도와 조상숭배의 기본 태두리 안에서 가족들의 화목을 가져올 수 있는 합의점을 찾으면 될 것이다.

<효령대군19대손>

Saturday, November 5, 2011

세가지 은혜 -마쓰시다 고노스게

'

내쇼날電器産業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

松下幸之助 1894 - 1979

"가난, 허약체질, 무학(無學)이 성공의 바탕이었습니다."

일본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 중 한 사람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독특한 경영이념과 탁월한 통찰력 및 국제감각으로 세계시장에서

나쇼날(National), 파나소닉(Panasonic), 테크닉스(Technics), 빅터(Victor) 등의

브랜드를 히트시켰으며
아흔 넷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 산하 570개 기업에
종업원 13만명을 거느린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환경은 불우하여, 일찍이 아버지의 파산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 점포의 점원이 되었고, 밤이면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리는

울보로 지냈습니다.

그런 그가 일본 굴지의 기업 총수가 되었을 때

한 직원이 물어 보았습니다.

"회장님은 어떻게 하여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두셨습니까?”

그러자 마쓰시타 회장은 자신이 세 가지 하늘의 큰 은혜를 입고

태어난 것이 바탕이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세가지 큰 은혜란

1. 가난한 것
2. 허약한 것
3. 못 배운 것

이란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직원은 어안이벙벙하여 “이 세상의 불행을 모두 갖고 태어나셨는데도

오히려 하늘의 은혜라고 하시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하며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마쓰시타 회장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도 일찌기 깨달아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써 지금 90살이 넘었어도 30대의 건강으로 겨울철 냉수마찰을 한다네.

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항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 데에
노력하여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었다네.

불행한 환경은 나를 이 만큼 성장시켜주기 위해
하늘이 준 시련이라고 생각하여 늘 감사하고 있다네."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과 시련을 오히려 하늘이 준 은혜로 생각하고
열심히 스스로 훈련하고 노력한 결과 마쓰시타 회장은
훌륭히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Sunday, October 23, 2011

격물치지[格物致知]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www.yetgle.com/gogu0008.htm

중국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8조목으로 된 내용 중, 처음 두 조목을 가리키는데, 이 말은 본래의 뜻이 밝혀지지 않아 후세에 그 해석을 놓고 여러 학파(學派)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주자학파와 양명학파이다.


주자는 「()」을 이른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모든 사물의 이치(理致)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앎에 이른다(致知)고 하는, 이른바 성즉리설(性卽理說)을 확립하였고, 왕양명은 사람의 참다운 양지(良知)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物欲)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여, 격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풀이한 심즉리설(心卽理說)을 확립하였다.

, 주자의 격물치지가 지식 위주인 것에 반해 왕양명은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고 있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이라 하고,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한다.

주자의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상 만물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 이치를 지니고 있다. 이 이치를 하나씩 하나씩 추구해 들어가면 마침내 확연하게 세상 만물의 표리와 정표 조잡한 것들을 밝혀 낼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격물의 「격()」은 도달한다는 것이니 격물은 즉, 사물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만물이 지닌 이치를 추구하는 궁리(窮理)와도 같은 뜻이라 하겠으며 세상 사물에 이르고 이치의 추궁으로부터 지식을 쌓아올려서 지()를 치()한다는 것이다.


주자에 심취하였던 왕양명은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격물치지의 진수를 실제로 체득해 보려고 하였다. 이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있다는 주자의 말대로 자기 집 둘레에 있는 대나무 숲의 그 무수한 대나무 그루마다 이()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왕양명은 오랫동안의 세심한 관찰 끝에 한 그루씩 대나무를 잘라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로 실험을 아무리 거듭해 보아도 대나무에서는 기대했던 주자의 이()라는 것을 발견하지도 터득할 수도 없었다. 번민한 나머지 왕양명은 병이 들고 말았다. 왕양명은 주자의 학설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으며 드디어는 주자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주자와 달리 그가 생각해낸 격물치지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격물의 물이란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니 사() , 일이다. 일이란 부모를 모시고 섬긴다거나 임금을 받들고 섬긴다거나 하는 것으로 마음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그 이면에 마음이 있으며, 마음의 곁에는 달리 물건이라든가 이치 따위가 없다. 때문에 격물의 격이란 바로잡는다라 해석해야 한다. 일을 바로잡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곧 격물이다. 악을 버리고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사람 마음속에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양심과 지혜를 밝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를 치()한다는 치지란 말이다.

Friday, October 14, 2011

법륜스님, '기독교'를 말하다

법륜스님, '기독교'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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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4 11:14 | 기본폴더 | Wikitree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푯말을 들고 종교를 강요하는 분들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지요.

교회에 안 나가면 폭삭 망할 것처럼 협박하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정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실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을 가고, 안 믿으면 정말 지옥으로 가는 걸까요?

어제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 100회 강연에서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기독교인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에 대해 회의가 든다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도 물었는데요. 법륜스님이 이야기하는 성경 이야기가 정말 흥미롭고 감동적이었습니다.^^.

- 질문자 :

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술과 악연이 많아서 부모님 두 분 다 술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고, 그 해답을 신앙에서 찾았어요.

주위에 교회 다니는 분도 없었지만 그런 해답을 찾기 위해 초등 2학년 때부터 제 발로 걸어들어가서 교회에 다녔어요.

주일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교회 다니면 천국 가고 안 다니면 지옥 간다”는 목사님 말씀을 철썩 같이 믿어 왔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엄청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였거든요. 중학생이 되어 교회 다니는 것이 귀찮아서 늦잠 자서 안 나갈 때도 항상 “교회 안 나가면 지옥 간다”는 말을 들어왔어요.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니까 “예수천국 불신지옥” 그런 가르침들이 너무나 혐오스러워요.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제가 어떻게 사랑해야 될까요?

- 법륜스님 : 기독교인이라는 것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 질문자 : 예수님의 희생하심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 법륜스님 : 그렇죠.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기도가 끝날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요

이 말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자각했다는 뜻이예요.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자각했는데 세상에 겁날 것이 있어요, 없어요?

- 질문자 : 없습니다.

- 법륜스님 : 그래서 세상에 나가서 진리를 설파했어요. 그런데 진리를 설파하는 내용이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의 가르침과 달랐어요. 그래서 갈등이 생긴 거예요.

그 중에 한 가지 예를 들면 유대교는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다. 그래서 구원은 유대인만 받을 수 있어요.

유대인 아닌 사람은 구원을 못 받아요. 구원의 기준이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것이였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아닌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그래서 난리가 났어요. 도대체 니가 누군데 그런 엄청난 얘기를 하느냐는 거죠. 지금 보면 상식적인 얘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고 혹세무민하는 얘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셨어요. “여러분 여기 중환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못하는 버려진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율법주의 학자들이나 바리새 교인들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그 환자를 보고 잘 돌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가 더 좋아 보였겠습니까?” 그러니까 거기 앉아 있던 대중이 전부 다 “사마리아인요.” 이랬어요. 이게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얘기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 소식이에요.

구원의 기준이 유대교는 민족인데, 예수님께서는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구원이 되는 게 아니라 여기 작은 자 하나를 보고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이것이 구원의 기준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것은 뒤에 가면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 이렇게 나옵니다. 왕께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일으켜 세워서 양떼와 이리떼를 나누듯이 다 나누고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지옥에 갈지언정..., “왜 우리가 지옥에 가야됩니까?,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지 않았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걸 주지 않았고, 내가 목 마를 때 마실 걸 주지 않았고, 내가 나그네 됐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보러 안 왔다” 이랬습니다.

“주가 언제 그런 적이 있고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니라" 하셨어요, 이게 구원의 기준이에요.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거예요.

뭐 태양이 지구를 돈다 이런 얘기는 예수님의 말에 없어요. 구약에는 있는지 몰라도요.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여기 환자가 하나 있는데 신부님과 목사님은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스님이 지나가다 그를 돌봤다. 하나님 보시기에 누가 좋아 보이시겠느냐?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간다면 구원이 교회 안에 있다 하는 것은 유대교적 논리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마치 불교가 사람이 죽어 소 됐다가 개 됐다가 돼지 됐다가 하는 것은 힌두교의 논리이지 불교 논리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인들은 그것이 마치 불교인냥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질문자도 지금 상황에서는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즉 십자가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느냐? 혹세무민 한다고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고 못 박았을 때, 저 같으면 어떻게 말했겠어요? “주여, 내가 참고 참았지만 저 두 인간은 지옥에다 집어 넣어주세요.” 그랬겠죠. (대중웃음)

그게 솔직한 심정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주여,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그랬어요. 지금 우리가 흉내 내려 해도 안 돼요.

예수의 육신은 십자가에 매달고 죽일 수 있었어도 그의 영혼은 아무 상처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몸은 죽어도 그 마음은 죽일 수 없는... 뭐 몸둥이가 3일 만에 살아나고 어쩌고 그런 건 제가 볼 때는 핵심이 아니에요.

그러니 그것을 다른 종교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기독교 속에 이미 세상에 열린 자세를 갖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대로 돌아가시면 돼요

- 질문자 : 정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저녁 예배를 갈까 여길 올까 고민을 하다가 여기를 왔는데 하나님께서 제 생각을 스님을 통해서 열어 주신 것 같아요. 스님과 예수님께서 항상 동행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대중들 큰 웃음)

- 법륜스님 : . 맞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방식으로 얘기해도 아무 모순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 방식으로 말하면 이 세상의 천하 만물은 다 창조주의 피조물 아닙니까?

그럼 스님도 피조물이죠.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통해 역사를 하고 자기 뜻을 관철시킵니다. 그러니까 스님을 통해서 역사를 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맞는 얘기에요. 그러니 스님을 통해서도 은혜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대중 웃음과 박수)

제가 볼 때는 성경 속에 이미 수행적 관점이 광장히 많습니다. 우리 불교에 이런 말이 있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돼라. 이것을 “수처작주” 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성경의 말을 빌리면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줘라.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줘라” 이 말입니다. 누가 5리를 가자 그러면 억지로 끌려가잖아요. 내가 종속적인 존재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10리 가 줄께 이러면 그 상황에서 주인은 내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 분의 육신은 죽어도 그 분의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어요. 우리는 몸이 아프면 마음이 따라 움직여서 괴로워하지요.

그런데 몸을 죽였는데도 그 영혼이 거기에 구애를 안 받았잖아요. 그들을 용서하라는 마음을 냈잖아요. 이것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과 열반이에요. 몸은 죽여도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잖아요.

그러니까 꼭 불교라 안 해도 기독교 신자가 남편이 바람을 폈다고 "이 놈이!’ 하다가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자신을 죽여도 용서했는데 바람 정도 피웠다고 용서 못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이죠. (대중웃음)

그러니 불교다, 기독교다 이런 얘기는 그리 중요한 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똑같다는 얘기도 아니에요. 각각의 묘미가 있고 맛이 있는 거예요. 한 단계 넘어서서 진리를 봐야 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이 일어나서 그것을 지금까지 움켜쥐고 있었을 뿐이지 그것을 탁 내려놔 버리면 바로 해방되는 거예요. 문제는 이 깨달음의 길을 갈 것이냐 아니면 어리석은 생각을 움켜쥐고 괴로움의 세계로 갈 것이냐 갈림길에서 자기 선택인 겁니다.

마지막에 질문자가 “저녁 예배 갈까 고민하다가 이곳에 왔는데...” 하는 순간 청중들 모두가 빵 터졌습니다.

종교를 넘어서서도 막힘없이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유쾌했네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과 부처님이 함께 동시대에 사셨다면 정말로 절친한 친구처럼 지내지 않았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성경의 이 구절을 듣는 순간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를 넘어서서 근본은 함께 통하는구나를 깊이 느꼈습니다.

* 덧붙여.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엄마수업] 이라는 새책으로 나왔습니다. 법륜스님 들려주는 우리 아이 지혜롭게 키우는 법, 지금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어요~

법륜스님이 "희망세상 만들기"를 주제로 전국 100회 연속 강연을 진행 중입니다. 우리 동네에서 법륜스님을 직접 만나 질문을 하실 수 있어요. 참가비는 무료입니다.

Friday, August 5, 2011

익안대군에 대하여

익안대군 에 대하여

益安大君은 태조고황제의 제3남으로 정종대왕의 동생이며 태종대왕의 형이다. 신의고황후 한씨의 소생으로 1360년(고려 공민왕 11)에 태어나 1404년(태종 4)에 별세하였다.
대군의 휘는 방의(芳毅)이고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성품이 온화순결하고 사리밝은 인덕의 귀공자였다. 고려말 혼란한 때 태조고황제가 정국을 안정시킬 무렵 대군은 모든 일에 조직적으로 계획을 치밀히 세워 도움을 주었다.

그로 말미암아 1392년 태조고황제가 왕위에 오를 때 대군의 공이 높아 개국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또한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사태수습의 중심이 되어 태종대왕으로 하여금 간신을 제거하게 하여 초기의 왕실을 튼튼히 바로 잡는데 공이 컸으므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거듭 책록되었다. 대군은 황실의 지친으로서 두 조정에 큰 공적을 세워 개국 • 정사 1등공신에 거듭 책록 되었음 에도 겸양지덕으로 일생을 깨끗이 마쳤다.

태종대왕은 대군을 중히 여기며 끝까지 신임하였다. 대군이 병중에 있을 때에 태종대왕은 친히 문병하여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곧 이어 주연을 베풀고 즐기다가 태종대왕이 말하기를
“형님이 병환중에 오래 앉아 대화하기가 수고로울 것이 심히 염려됩니다.”고 하니 대군은 화답하기를 “신이 지금 병이 깊은데 어느날에 나가 뵈올는 지 기약할 수 없습 니다. 원컨대 조금 더 머무르시어 신이 취하여 자리에 눕는 모양을 보소서.”하였다. 태종대왕은 대군과 같이 즐기다가 밤늦게 환궁하였으니 형제 우애가 남달리 돈독하였다.

대군의 성품은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고 밖으로는 왕실과 사직을 안정시키는 대의(大義)가 불같아서 크게 공헌하였다. 대군이 쓴 충효전가(忠孝傳家)'의 유훈을 후손들이 받들어 기리고 있다.
1404년(태종 4) 대군은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세상을 떠날 당시 태조고황제는 상왕으로서 부의와 거마(車馬)를 보내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대군의 묘소는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사곡리 백암동 해좌 언덕에 예장하였고 정종묘정(定宗廟庭)에 배향되었다.

대군은 삼한국 대부인 정경옹주 철원최씨와 혼인하여 익평부원군(益平府院君) 석근(石根)과 2녀를 두었고, 부부인(府夫人) 이씨와의 사이에 영가정(永可正) 승(昇)을 낳아 모두 2남 2녀를 두었다.

익평부원군은 신의군(愼義君) 인(仁) • 신성군(愼城君) 의(義) • 반남도정(潘南都正) 예(禮) • 종남도정(終南都正) 지(智) • 양진정(楊津正) 신(信) • 대림도정(大林都正) 강(綱) • 백파도정(白波都正) 상(常) 등 7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신의군(改封 : 廣川君 以仁)은 진안대군파로 출계하였다.

영가정은 소리수(小利守) 극문(克文) • 동평수(東平守) 극명(克明) • 다경정(多慶正) 유강(有康)의 3남과 1녀를 두었다.

종남도정 • 양진정은 후사가 없고 반남도정 • 대림도정 • 백파도정의 후손만이 대를 이어 왔다.
또한 영가정의 장남 소리수 • 차남 동평수도 무후해서 3남 다경정 후손이 계승하여 영가정파를 계승하고 있다.

지금 익안대군의 지파로는 신성군파 • 반남도정공파 • 대림도정공파 • 백파도정공파 • 영가정공파 등 5개파로 분파되었다.

익안대군의 후손들 중에는 문과급제 16명, 무과급제 38명, 이조판서 1명, 예조판서 1명, 호조판서 2명, 병조판서 2명 등을 배출하였으며 도승지 4명, 승지 13명, 육조의 참판 24명, 의정부 좌찬성 1명, 참의 6명, 사헌부 대사성 2명, 대사헌 1명, 사헌부 감찰 4명, 관찰사 4명, 한성판윤 4명, 병마절도사 3명, 중추부 판사 1명, 청백리 2명, 공신 7명, 증직 43명, 수직 11명 등을 배출하였으며 무관으로는 절충장군 25명, 어모장군 13명, 상호군 9명, 부호군 10명 선략장군 11명을 배출하였다.
또한 관직품계를 제수받은 것은 대광보국 숭록대부 2명, 숭록대부 1명, 숭정대부 3명, 소덕대부 2명, 가덕대부 1명, 자헌대부 8명, 숭헌대부 1명, 정의대부 2명, 창선대부 12명, 가선대부 66명, 명선대부 4명, 통정대부 74명, 통훈대부 37명, 봉정대부 1명, 조봉대부 3명 등이다.

익안대군 후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은 정계에서 인제(仁濟), 부영(富榮) 등이 있고 의료계에서는 길녀(吉女)가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외 많은 후손들이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각 지파별로 직계의 숭조사업에 진력하고 있다.

선원보에 기초하여 익안대군파보는 1798년(정조 22) <무오보>를 비롯하여 1847년(헌종 13)에 <정미보>가 속간되고 1865년(고종 2)<을축?gt;, 1873년(고종 10)<계유보>, 1902년(광무 6)<임인보>가 모두 선원속보에 속한다.일제 강점 후에도 <병인보(1926)>•<정축보(1937)>와 광복 후에는 <정유보(1957)>가 누차에 걸쳐 수보가 속간되었다.
그러나 과거 수보과정에서 교통 통신의 불편과 난리 • 사화(士禍) 등을 거친 까닭으로 누보자(漏譜者)가 많아 1983년<계해보>를 증보하여 <익안대군파보>를 발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대군의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影堂)은 서울에 있었으나 강원도 원성(原城 : 원주)으로 이전, 다시 경기도 여주로 이전하였고 그 후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종손인 내욱(來旭)이 영정을 부대(負戴)하여 전전하던 중 파종회장 경식(敬植)의 권유와 설득으로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 백파도정공 후예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그 곳의 대군 후손들이 기꺼이 맞아 영당을
건축하고 영정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영정과 어필은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기신제와 2월, 8월 중정(中丁)에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또한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삼방리 대군 배위 묘역에는 남북 분단으로 대군의 묘제를 올리지못하는 안타까움에 설단(設壇)하고 춘추 두 번에 걸쳐 제를 올리고 있다. 1996년에는 재실인
영모재(永慕齋)를 신축하고 대군의 유훈을 흠모하며 배향하고 있다.

분포상황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계해보(癸亥譜)>(1983년) 간행을 통해서였다.

익안대군 후손의 집성촌으로는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여주 • 이천 안양 • 포천, 강원도 춘천 • 원주 • 철원, 충청도의 청주 • 보은 • 영동 • 옥천 • 공주 • 대전 • 논산, 경상도의 대구 • 산청 • 고성 •
사천 • 상주 • 삼랑진, 전라도의 전주 • 군산 • 옥구 • 목포 • 여수 등지이며 북한지역과 해외에도 상당수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이것을 집계하여 보면 1만 3천세대에 6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각 지파별로 집계하면 다음과 같다.

파  별 세 대 수 인 구 수
신 성 군 파 1,400 7,000
반남도정파 3,000 15,000
대림도정파 3,400 17,000
백파도정파 4,000 20,000
영 가 정 파 1,400 7,000
합  계 13,200 66,000

Sunday, June 19, 2011

한국 성씨 탄생 의 비밀

★한국 姓 氏 탄생의 비밀 ★ 조선초만해도 성씨있는 양반은 10%뿐이 안되었는데 조선중기 양반계급이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부터 평민들도 각 씨족 별로 구전 해오던 자료에 의하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토착민들은 지역별 연결에 따라 동일 씨족으로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집성촌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한 유랑민이거나 원래 천민은 성씨없이 돌쇠,떡쇠, 개똥이, 삼돌이 등 이름으로만 불리웠는데 조선후기에는 양반들의 도움으로 성 하나 만은 가지게 되었고. 1909년 일제가 민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천민들에게 다시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일제가 주었는데,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가 흔하면서도 유명한 '김, 이, 박 등등'이었다. 

 그래서 유명한 성이 더욱 흔해지게 된 것이다.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이들에게 신청하는 대로 유명성씨의 호적을 준 것은 조선의 양반 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나온 것이고, 노비를 양민화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 

 김좌진 장군댁 노비 100명도 안동 김씨 호적을 만들어 가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양반집 법도는 엄격한 유교의 윤리로 교육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으로 행세하기는 행동거지가 참으로 어렵고 엄했다고 한다. 따라서 천민은 흉네 낼 수도, 낼 필요성도 느끼지 못는 사회였다. 현재 품성과 관계없이 성씨로 양반입네 떠드는 사람들은 양반집의 돌쇠이었거나, 그 마을 '개똥이'였을 확률이 높은 것은 아닌지?

 양반은 항상 따르는 권속들에 대한 책임감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중압감을 느끼며 생활하였으며 자신의 행동이 가문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오늘같은 막된 행동이나 막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며 지역사회에서 한번 쌍놈의 가문으로 찍혀지면 자녀들의 출가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성씨가 그 사람의 품행을 구속했다고 한다.

 법도와 예를 생명같이 여기고 살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점에서 양반사회는 순기능 역활도 했다고 판단된다. 성씨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하여 아래의 자료를 첨부해 본다. 2000년에 조사한 우리 나라의 성씨별 인구가 통계청 홈페이지에 떴는데, 1985년 발표 당시보다 성씨의 숫자가 12 개 늘었다. 그 때는 274개였는데, 이번은 286개가 되었다. 

 우리 나라 10대 성씨의 순위는 변화가 없었다.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임(林)... “김(金)” 씨는 우리 나라 인구의 21.6%인 992만 여 명으로 여전히 제일 많았다. “이(李)” 씨는 그보다 훨씬 적은 14.8%로 679만 여 명으로 조사되었다. “박(朴)” 씨는 또 그보다 훨씬 적은 8.5%로 389만 여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잇는“최(崔),정(鄭)”씨는 4% 대이고, “강(姜), 조(趙), 윤(尹), 장(張)”씨는 2% 대, 그리고“임(林)”씨부터 21위“전(全)”씨까지 1%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씨별 인구 수가 거의 일정한 차이를 유지하며 계속 나열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성씨는 1위부터 2, 3위의 분포가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 특정 성씨로 지나치게 몰리는 경우가 없다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만 1, 2위가 이상할 정도로 특별히 많아진 것은 1900년대 초에 처음 호적법이 시행될 때 “양반이 되고 싶은”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런 기형적인 분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에 “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 정책을 시행하여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이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각자 자기 집의 위치나 동네의 특징을 살린 성씨를 만들어서 가졌다고 한다. 

 田中, 中村, 松下...” 등 다양하게 창씨된 성씨의 숫자가 순식간에 8만 개나 되었는데.... 일본은 이러한 특징 때문에 특정 성씨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는 없다고 하며... 또한 성씨만 가지고는 가문의 역사 같은 것은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민족의 역사를 논할 때 성씨가 무언가 하는 것은 별로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당연히 성씨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착 같은 것이 거의 없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여기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일본이 우리 나라, 즉 대한제국에 와서도 계급을 타파한다면서 “신분 표시가 없는 호적법”을 시행하였고, 여기에서도“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운동을 전개하여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결과는 일본과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국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돌쇠, 밤쇠, 삼월이, 오월이..” 들은 일본처럼 새로이 성씨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이들 대부분이 그 동네 지주나 양반들에게 부탁하여 그 “양반님”들의 성씨를 얻어 와서는 관청에 신고하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 때에 김(金) 씨나 이(李) 씨가 갑자기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특정 성씨가 총 인구의 20%를 넘어 가는 경우는 없는데, “양반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던” 우리 나라에서만 나타난,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여튼 우리나라는 결과적으로 “전 국민의 양반화”가 자연스러이 이루어졌고, 옛날 이야기에 그 많던 “방자, 향단이, 마당쇠, 구월이...”의 자손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슨 무슨 정승, 판서의 몇 대 손”이 되어 버렸고, 오로지 양반의 후손만이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덕분에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양반이 많은 나라가 되었고, 또한 제사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어 버렸다. 

불과 100 여 년 전만 해도 “성씨도 없는 쌍놈들”은 제사고 차례고 지낼 수가 없었는데, 요즈음은 집집마다 장손이면 모두 명절날 차례를 지낸다. 참고로 5000년 전부터 성씨를 사용해 온 중국의 경우를 보면 성씨별 인구 1, 2, 3위의 비율은 각각 7.4%, 7.2%, 6.8%로 되어 있어서, 특정 성씨로 몰리는 현상은 없다. 중국은 인구 0.1% 이상을 차지하는 성씨가 모두 129개로 나타났는데, 이 129개 성씨의 인구 합계는 중국 인구의 87% 라고 한다. 


 이는 2006년 1월 10일 중국과학원에서 중국역사상 가장 정밀한 자료조사를 거쳐 발표했다는 “100대 성씨”에 근거한 것이다. 이번 발표에서 “인구기준 성씨순위”가 1987년의 발표자료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표본조사한 기초자료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1987년 조사는 겨우 57만 명 정도를 표본조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고, 이번 조사는 그 때에 비하여 500배도 넘는 약 3억 명을 표본 조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기 때문에 그 정밀도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이번 조사에서 중국 10대 성씨는 “이(李), 왕(王), 장(張), 유(劉), 진(陳), 양(楊), 황(黃), 조(趙), 주(周), 오(吳)”로 판명되었다. 이 순위는 자동적으로 전세계의 10대 성씨가 되기도 한다. 이 중 “李”는 중국 인구의 7.4%인 9천 600만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679만여 명을 합치면 “李”씨는 1억 명을 넘어 가는 세계 유일의 성씨가 된다. 

 약 900년 전인 서기 1100년대에 북송(北宋)에서 발표한 『백가성(百家姓)』이란 책자가 최초의 성씨 조사 기록이었고, 명(明)나라의 『천가성(千家姓)』, 청(淸)나라의 『백가성(百家姓)』 등이 뒤를 이었으나 이 책들은 모두 성씨별 인구수를 기준으로 서열을 매긴 것은 아니었다.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趙錢孫李周吳鄭王...”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인구수 순위가 아니었다. “조(趙)”는 북송을 건국한 황제의 성이었고, “전(錢)”은 당시 가장 힘이 강했던 오월국(吳越國)의 국왕 성씨였고, “정(鄭)”은 그 왕후의 성씨였으며, “이(李)”는 그 다음 강국인 “남당(南唐)”의 국왕 성씨였던 것인데... (중국의 1100년대는 송나라가 약간 힘이 강한 정도였고, 고만고만한 나라들로 나누어져서 도토리 키재기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인구 순이 아니라 예우(?)를 받아야 할 성씨의 순위였고, 최근 중국 일부 신문에서 보도한 “900년만에 조(趙)가 1위에서 8위로 밀렸다”는 내용은 옛날 기록의 특징을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 나라 성씨의 순위를 기준으로 하여 중국 성씨 순위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金 : 21.59%, 한국 1위 (중국 64위) 한국 발음이 현재는 “김”이지만 옛날에는 “금”으로 읽었다는 주장도 있음. 현재 중국 배우 중에도 이 성씨를 가진 배우가 있는데 “금성무”라고 보도되고 있음. 이 글자의 현대식 중국 표준발음은 “찐”임. 李 : 14.78%, 한국 2위(중국 1위 7.4%) 한국, 중국 합하면 1억이 넘어 가는 전 세계 단 하나의 성씨임. 중국, 북한에서는 “리”라고 하는데, 남한에서만 “이”라고 읽고 있음. 그런데, 남한 사람들도 영어로 쓸 때에는 대부분 “Lee(리)”라고 하는 버릇이 있음. 

 : 8.47%, 한국 3위 (중국 100위 내에서는 안 보임) 한자로 “朴”을 쓰기도 하지만, 원래 “바가지”란 뜻의 순우리말 토종 성씨임. “박혁거세”의 “박”은 “박만큼이나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붙은 말임 영어로 'Park' 'Pak' 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으나 'Paak' 이라고 쓰는 것이 가장 무난함. 최(崔) : 4.72%, 한국 4위 (중국 58위) 정(鄭) : 4.37%, 한국 5위 (중국 21위) 강(姜) : 2.27%, 한국 6위 (중국 50위) 조(趙) : 2.14%, 한국 7위 (중국 8위) 윤(尹) : 2.06%, 한국 8위 (중국 95위) 장(張) : 2.00%, 한국 9위 (중국 3위) 임(林) : 1.66%, 한국 10위 (중국 17위/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오(吳) : 1.54%, 한국 11위 (중국 10위) 한(韓) : 1.53%, 한국 12위 (중국 26위) 신(申) : 1.52%, 한국 13위 (고려태조가 하사한 성씨, 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 일족이 있음) 서(徐) : 1.51%, 한국 14위 (중국 11위) 권(權) : 1.42%, 한국 15위 (중국 100위 이내 없음) 황(黃) : 1.40%, 한국 16위 (중국 7위) 안(安) : 1.39%, 한국 17위 (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송(宋) : 1.38%, 한국 18위 (중국 23위) 유(柳) : 1.31%, 한국 19위 (중국 100위 이내 없음/ 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 .

(洪) : 1.13%, 한국 20위 (중국 99위) 전(全) : 1.07%, 한국 21위 (중국 100위 이내 없음/고려 왕씨 유래설이 있음) 고(高) : 0.95%, 한국 22위 (중국 19위) 문(文) : 0.93%, 한국 23위 (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손(孫) : 0.90%, 한국 24위 (중국 12위) 양(梁) : 0.85%, 한국 25위 (중국 20위) 배(裵) : 0.81%, 한국 26위 (중국 100위 이내 없음) 조(曺) : 0.79%, 한국 27위 (중국 27위) 백(白) : 0.76%, 한국 28위 (중국 79위) 허(許) : 0.65%, 한국 29위 (중국 28위) 남(南) : 0.56%, 한국 30위 (중국 100위 이내 없음/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

우리 나라 31위 이후의 성씨는 다음과 같음. 31-40에서는 심(沈), 유(劉), 노(盧), 하(河), 전(田), 정(丁), 성(成), 곽(郭), 차(車), 유(兪), 41-50 에서는 구(具), 우(禹), 주(朱), 임(任), 나(羅), 신(辛), 민(閔), 진(陳), 지(池), 엄(嚴), 51-60에서는 원(元), 채(蔡), 강(康), 천(千), 양(楊), 공(孔), 현(玄), 방(方), 변(卞), 함(咸), 61-70에서는 노(魯), 염(廉), 여(呂) ,추(秋), 변(邊), 도(都) ,석(石), 신(愼), 소(蘇), 선(宣), 71-80 에서는 주(周), 설(薛), 방(房), 마(馬), 정(程), 길(吉), 위(魏), 연(延), 표(表), 명(明), 81-90 에서는 기(奇), 금(琴), 왕(王), 반(潘), 옥(玉), 육(陸) ,진(秦), 인(印), 맹(孟), 제(諸), 91-100에서는 탁(卓), 모(牟), 남궁(南宮), 여(余), 장(蔣), 어(魚), 유(庾), 국(鞠), 은(殷), 편(片), 101-110에서는 용(龍), 강(疆), 구(丘), 예(芮), 봉(奉), 한(漢), 경(慶), 소(邵), 사(史), 석(昔), 111-120에서는 부(夫), 황보(皇甫), 가(賈), 복(卜), 천(天), 목(睦), 태(太), 지(智), 형(邢) ,피(皮), 121-130 에서는 계(桂), 전(錢), 감(甘), 음(陰), 두(杜), 진(晋), 동(董), 장(章), 온(溫), 송(松), 131-140 에서는 경(景), 제갈(諸葛), 사공(司空), 호(扈), 하(夏) ,빈(賓) ,선우(鮮于), 연(燕), 채(菜), 우(于), 141-150에서는 범(范), 설(?), 양(樑), 갈(葛), 좌(左), 노(路), 반(班), 팽(彭), 승(承), 공(公) 151-160 에서는 간(簡) ,상(尙) ,기(箕), 국(國) ,시(施), 서문(西門), 위(韋), 도(陶), 시(柴), 이(異), 161-170 에서는 호(胡) ,채(采), 강(强), 진(眞), 빈(彬), 방(邦) ,단(段), 서(西), 견(甄), 원(袁), 171-180 에서는 방(龐), 창(昌), 당(唐), 순(荀), 마(麻), 화(化), 구(邱) ,모(毛) ,이(伊), 양(襄), 181-190에서는 종(鍾), 승(昇) ,성(星), 독고(獨孤), 옹(邕), 빙(?), 장(莊), 추(鄒), 편(扁), 아(阿), 191-200 에서는 도(道), 평(平), 대(大), 풍(馮), 궁(弓), 강(剛), 연(連), 견(堅), 점(占), 흥(興), 201-210 에서는 섭(葉), 국(菊), 내(乃) ,제(齊), 여(汝) ,낭(浪), 봉(鳳), 해(海), 판(判), 초(楚), 211-220에서는 필(弼), 궉(?) ,근(斤), 사(舍), 매(梅), 동방(東方), 호(鎬), 두(頭), 미(米), 요(姚), 221-230 에서는 옹(雍), 야(夜), 묵(墨), 자(慈), 만(萬), 운(雲), 범(凡), 환(桓), 곡(曲), 탄(彈), 231-240 에서는 종(宗) ,창(倉,) 사(謝), 영(永), 포(包), 엽(葉), 수(水), 애(艾), 단(單), 부(傅), 241-250 에서는 순(淳) ,순(舜), 돈(頓), 학(?), 비(丕) ,영(榮), 개(介), 후(侯), 십(?), 뇌(雷), 251-260 에서는 난(欒) ,춘(椿), 수(洙) ,준(俊), 초(肖), 운(芸), 내(奈), 묘(苗), 담(譚) ,장곡(長谷), 261-270 에서는 어금(魚金), 강전(岡田), 삼(森) ,저(邸), 군(君), 초(初), 영(影), 교(橋), 순(順), 단(端), 271-280 에서는 후(后), 누(樓), 돈(敦), 소봉(小峰), 뇌(賴), 망절(網切), 원(苑) ,즙(?), 증(增), 증(曾), 281는 삼(杉) <남자 2명> 282 는 우(宇)': <남자 1명> ,소(肖),예(乂), 빙(氷), 경(京),: <여자 각 1명> (이상 총 286개 성씨) .

이 중 최근에 새로 생긴 성씨 중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잘못 기재하여 그리 된 것도 있고, 국제 결혼으로 우리 나라 국적을 취득한 동남아 또는 중국 사람들의 성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 중국의 주요 성씨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李 : 중국 7.4%, 중국 1위 (한국에서는 2위)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이 개국공신들에게 “李”를 하사했고, 나중에 후위(後魏)의 선비족(鮮卑族)에서도 “李”씨로 바꾸어 사용한 사람들이 많음. 중국인들은 영어로 표기할 때 'Li'를 주로 사용하며, 미국 'Lee'와의 관계는 불명확함 王 : 중국 7.2%, 중국 2위 (한국에서는 83위) 중국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사이의 신(新)나라 때 황제 왕망(王莽)의 성씨임. 

 중국 사람이라 하면 “비단장사 왕서방”이라 할 정도로 중국에 왕 씨가 많았음 한국에서도 고려시대 왕족이 “왕건(王建)”의 왕씨였으나 고려 멸망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춤. 張 : 중국 6.8%, 중국 3위 (한국에서는 9위) 장삼이사(張三李四 : 중국인들은 대개 張씨네 셋째 아들 아니면 李씨네 넷째 아들이라는 뜻)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중국에는 전통적으로 張씨가 많았음. 지금도 “장가계(張家界)”는 관광지로 유명함.“왕삼이사(王三李四)”란 말이 생기지 않은 것은 “왕이 셋이면..”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됨. 劉(유) : 중국 4위 (한국에서는 32위) 陳(진) : 중국 5위 (한국에서는 48위) 楊(양) : 

6위 (한국에서는 55위) 黃(황) : 중국 7위 (한국에서는 16위) 趙(조) : 중국 8위 (한국에서는 7위) 周(주) : 중국 9위(한국에서는 71위) 吳(오) : 중국 10위(한국에서는 11위) 徐(서) : 중국 11위(한국에서는 14위) 孫(손) : 중국 12위(한국에서는 24위) 朱(주) : 중국 13위(한국에서는 43위) 馬(마) : 중국 14위(한국에서는 74위) 胡(호) : 중국 15위(한국에서는 161위) 郭(곽) : 중국 16위(한국에서는 38위) 林(임) : 중국 17위(한국에서는 10위) 何(하) : 중국 18위(한국에는 없음) 高(고) : 중국 19위(한국 에서는 22위) 梁(양) : 중국 20위(한국에서는 25위) 鄭(정) : 중국 21위(한국에서는 5위) 羅(나) : 중국 22위(한국에서는 45위) 宋(송) : 중국 23위(한국에서는 18위) 謝(사) : 

중국 24위(한국에서는 233위) 唐(당) : 중국 25위(한국에서는 173위) 韓(한) : 중국 26위(한국에서는 12위) 曹(조) : 중국 27위(한국에서는 27위) / 한국에서는 “曺(조)”란 글자를 주로 사용함 許(허) : 중국 28위(한국 에서는 29위) 鄧(등) : 중국 29위(한국에는 없음) 蕭(소) : 중국 30위(한국에는 없음) 중국 31위부터 100위까지는 다음과 같음 31-40 馮(풍),曾(증),程(정),蔡(채),彭(팽),潘(반),袁(원),于(우),董(동),余(여), 41-50 蘇(소),?(협),?(여),魏(위),?(장),田(전),杜(두),丁(정),沈(심),姜(강) 51-60 范(범),江(강),傅(부),?(종),?(노),汪(왕),戴(대),崔(최),任(임),?(육) 61-70 廖(료),姚(요),方(방),金(금),邱(구),夏(하),?(담),?(위),?(가),?(추) 71-80 石(석),熊(웅),孟(맹),秦(진),?(염),薛(설),侯(후),雷(뢰),白(백),?(용) 81-90 段(단),?(학),孔(공),邵(소),史(사),毛(모),常(상),万(만),?(고),?(뢰) 91-100 武(무),康(강),?(하),?(엄),尹(윤),?(전),施(시),牛(우),洪(홍),?(공) 중국 측 발표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성씨는 56개 종족에 약 12,000개의 성씨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13억 인구 전부를 조사 못해서 이런 추정치라는 것을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신판 『중국성씨대사전(中國姓氏大辭典)』에는 무려 23000개의 성씨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는 중국, 한국, 일본의 성씨에 대한 역사나 인식들에 대하여 약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우선 중국의 성씨관... 중국은 예로부터 성(姓)과 씨(氏)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원래 성(姓)이라 함은 모계제 사회의 흔적으로 “어머니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씨(氏)는 “출생한 뒤에 아버지와 함께 살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국인들이 모두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황제(黃帝)”의 경우 성(姓)은 “희(姬)”이고 씨(氏)는 “헌원(軒轅)”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격이 조금 바뀌어 황제(皇帝), 즉 천자(天子)가 내려 주는 것은 성(姓)이라 했고, 제후(諸侯) 또는 국왕(國王) 정도가 내려 주는 것은 씨(氏)라 했다. 언제나 성(姓)이 한 단계 위의 개념이었는데, 보통 성(姓)은 한 글자였고, 씨(氏)는 두 글자가 많았다. 그리고 한(漢) 나라 때에 족보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천자가 각 제후나 공신들의 자제들에 대한 특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천자가 만든 족보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가 권력의 유무를 판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성씨는 남자들만의 혈통을 표시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생물학적으로 특정한 Y염색체의 유전 상황을 표시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중국의 성씨는 역사가 5000년이 되었고, 성씨는 문화의 전승과 남성 혈통의 흐름을 연구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같은 성씨이면 무조건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관습이 자연스러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혈연 관계는 인간생활에 활력을 넣어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성씨관... 원래 우리 나라의 토착민들은 성씨가 없었다고 한다. 계속적인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일부 고위 관리들에게서 성씨를 가진 자들이 간간이 나타났고, 삼국시대 말기 신라에서는 국력의 세계화를 기치로 내걸고 왕족을 중심으로 성씨를 스스로 만들어서 가졌다. 그래서 왕족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고 없는 먼 조상님들(혁거세, 알지 등등) 에게도 소급해서 성씨를 만들어 붙이고 했다.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나라는 양반보다 쌍놈들이 더 많았고, 성씨를 갖고 있는 사람들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대한제국 시절 일본의 압력 덕분에 호적에 성씨란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올린 사람들도 많았지만,“만들어 올렸다”는 그 사실은 언제까지나 “가문의 비밀” 로 숨겨 두어야 했다. 성씨의 유무와 관련한 성씨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우리 백성들은 양반제도가 비록 법적으로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어렵게 얻은 “양반의 성씨”만큼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1940년대에 일본이 “이제 조선과 일본은 명실상부한 한 나라”임을 강조하면서 일본식으로 창씨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발표하고, 앞으로 성씨로 인한 조선인, 일본인 간의 차별대우는 영원히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성씨 자체를 “가문의 역사”로 생각하는 많은 우리 백성들은 당연히 반대하였고, 성씨의 역사가 불과 50년밖에 안 되어 성씨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도 없었던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들의 반대를 보고 “거참, 이상하다. 그깟 성씨 가지고 왜들 저러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성씨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일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성씨를 만들어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신청 첫날 아침에 맨 먼저 신고하였는데, 이광수가 만든 성씨는 “일본 천황 고향의 뒷산인 향구산(香久山)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향산(香山)이었다. 이광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성씨란 건 별 것 아니야”라는 자기네들의 전통적 인식을 한국식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금의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자가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씨를 그대로 유지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전 세계의 남자들이 한국인들에게 깜짝 놀라는 것이 두 가지라 하는데, 한 가지는 부인의 성씨 문제이고, 또 한 가지는 “부인이 남편 통장을 관리”하는 것이라 한다. “자다가 벌떡 깨어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들이 보는 한국은 거의 구제불능성 선천적 여성천국이라 한다. . 일본의 성씨관... 일본은 우리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백제와 교류할 때부터 성씨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고, 오랜 기간 동안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 가물에 콩 나듯 하는 중국과의 교류도 크게 활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성씨의 위력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19세기말 미국이 군함을 밀고 들어오고, 일본 청년들이 세계일주도 하는 과정에서 외국인들이 “패밀리 네임”이란 것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을 보니 자기네들의 직업을 가지고 만든 성씨도 있고, 자기네 마을의 특징을 살려서 만든 성씨도 있었다. 그래서 일본도 성씨란 걸 만들어서 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학자들에게 물어 보니 동양 문화권에서는 성(姓)이라는 것도 있고 씨(氏)라는 것도 있는데.. 성(姓)이란 것은 황제가 직접 만들어서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라 하였다. 

 백성이 한두 명도 아닌데 어느 세월에 만들어서 준단 말인가... 그냥 일본은 씨(氏)를 만들어서 쓰기로 하고 창씨(創氏)하는 업무는 각 사무라이들에게 그냥 맡기기로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순식간에 수만 개의 씨(氏)가 만들어졌는데... 지금도 일본은 어떤 장부이든지 “성명(姓名)”이란 칸은 없고 어디든지 모두 “씨명(氏名)”이란 칸만 있다. 19세기 말 갑자기 시행된 창씨(創氏)였기 때문에 각자의 씨(氏)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청일 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게도 성씨 없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호적법을 만들어 창씨(創氏)의 기회를 주었으나, 조선인들은 이상하게도 창씨(創氏)는 않고 기존 양반들의 성(姓)을 빌려 와서 관청에 신고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 글자 짜리인 성(姓)을 사용하는 사람은 중국 또는 조선인이고 두 글자 짜리 씨(氏)를 쓰는 사람은 일본인.... 어찌 되었든 간에 국적 구별이 쉬워서 좋기는 했다. 조선을 삼키고 난 뒤에 조선인들로부터 “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해 놓고는 차별대우가 너무 심하다”는 등 불만사항이 많이 접수가 되었지만, 우선 이름에서부터 출신이 확연하게 표시가 나니 일본 정부로서도 별로 뾰족한 대책이 없어서 그냥 대충 세월만 보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들이 매일매일 죽어 나가고... 조선인들이라도 군인으로 뽑아서 내보내야겠는데 차별대우 해소를 위한 근본대책을 세우라고 매일 투덜대는 저 조선인들을 그냥 일본군으로 들여 보냈다가는 전투도 제대로 못해 보고 질 것 같고... 일본정부는 착잡해졌다. 누군가 묘안을 냈다. 

 일본식으로 창씨(創氏)할 기회를 한 번 더 줄 터이니 이 참에 일본식으로 제대로 창씨를 해라... 어차피 얼굴 생긴 것도 똑같고.. 조선 출신을 차별대우하고 싶어도 조선 출신이란 표시가 없으니 못할 것 아니냐... 그러나 그대신 조선 청년들 군대에 좀 가 줘야 되겠다.... 이렇게 하여 1940년대에 창씨(創氏)할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어떻게 그 동안 써 오던 성(姓)을 버리고 그보다 격이 낮은 씨(氏)를 쓸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일본인들로서는 얼른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법적으로 양반이란 것도 없어졌고 문벌이란 것도 이제 큰 의미가 없어졌는데 허울만 남은 성(姓)을 가지고 왜 그리 집착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도 차별대우 철폐란 것이 어차피 민간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문제이고 정책 차원에서 조선출신이라는 표시가 안 나게 해 주겠다는 것인데...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불만에 대해 잘 이해가 안 갔지만 그래도 강제 창씨를 계속 밀고 나갔다. (이 때 林, 柳, 南씨 일부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라 하여 새로 창씨를 하지 않았다고 함).... 

 그리고 조선인들을 일본군으로 받아 들여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선사람들만 일본군복을 입은 채로 애매하게 죽은셈이 되어 버렸고 몇 년 후 일본은 전쟁에서 졌다. 1945년에 전쟁도 끝이 나고 살림살이도 일본 내부로 축소되었으니 일거리도 줄어들고 오히려 편해졌다. 일본인들도 이제 성씨를 사용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간다. 100년 동안 의 짧은 역사가 일본인들에게 성씨에 대한 관념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성씨에 대한 뚜렷한 자부심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일본인은 성씨의 종류는 8만여 가지로 무지하게 많지만 성씨별 인구 수에 대해서는 아직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양반의 자손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일본인은 '근본도 모르는 쌍놈들'일 뿐이다. 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 교감 [출처] 한국 성씨 탄생의 비밀 |작성자 진호

Sunday, May 15, 2011

천국.사후세게? 꾸며낸 동화일 뿐,

호킹 “천국•사후세계? 꾸며낸 동화일 뿐”
Stephen Hawking says afterlife is a fairy story

英 가디언紙와 인터뷰… “죽음 이후 뇌는 고장난 컴퓨터” 주장 논란 일 듯
문화일보 | 고서정기자 | 입력 2011.05.16 12:01 | 수정 2011.05.16 12:11 | 누가 봤을까? 40대 남성, 대전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69•사진)박사는 15일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천국이나 사후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꾸며낸 '동화'에 불과하다"면서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뇌가 깜빡거리는 순간 이후에는 어떤 것도 없다"고 말했다.

대표적 무신론자인 호킹 박사는 부속품이 고장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에 인간의 뇌를 비유하면서 "고장난 컴퓨터에 천국이나 사후 세계가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그의 발언은 신의 존재를 부정해 2010년 출간되자마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저서 '위대한 설계'의 내용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논란이 예상된다.

'위대한 설계'는 '우주는 중력의 법칙과 양자이론에 따라 무(無)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담고 있어 종교계와 과학계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는 "과학은 우주가 무에서 창조됐다는 것을 설명한다"면서 "우주는 과학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다윈의 진화론을 효과적인 이론으로 활용하고 거기에 높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면서 "과학은 현상이나 다른 관찰 대상 사이의 연관성을 간략하게 설명해낼 때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호킹 박사는 "우리 행동의 가장 위대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며 "우리의 삶을 제대로 활용해 우리의 잠재력을 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1세 때부터 몸 속의 운동신경이 파괴되는 루게릭병을 앓아왔던 그는 "지난 49년동안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며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죽음을 서두르지 않는다"고 밝혔다.

고서정기자 himsg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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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en Hawking says afterlife is a fairy story

By Liz Goodwin Mon May 16, 11:07 am ET

Renowned physicist Stephen Hawking recently explained his belief that there is no God and that humans should therefore seek to live the most valuable lives they can while on Earth.


Guardian writer Ian Sample asked Hawking if he feared death in a story published yesterday. This was his response:
I have lived with the prospect of an early death for the last 49 years. I'm not afraid of death, but I'm in no hurry to die. I have so much I want to do first. I regard the brain as a computer which will stop working when its components fail. There is no heaven or afterlife for broken down computers; that is a fairy story for people afraid of the dark.
Hawking's 1988 book "A Brief History of Time" sold 9 million copies, and in it Hawking referenced God metaphorically as the force that could fully explain the creation of the universe.

But in 2010, Hawking told Diane Sawyer that "science will win" in a battle with religion "because it works."

"What could define God [is a conception of divinity] as the embodiment of the laws of nature. However, this is not what most people would think of that God," Hawking told Sawyer. "They made a human-like being with whom one can have a personal relationship. When you look at the vast size of the universe and how insignificant an accidental human life is in it, that seems most impossible."

Hawking's latest book, "The Grand Design," challenged Isaac Newton's theory that the solar system could not have been created without God. "Because there is a law such as gravity, the Universe can and will create itself from nothing. Spontaneous creation is the reason there is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why the Universe exists, why we exist. It is not necessary to invoke God to ... set the Universe going," he writes.

Hawking was diagnosed with the degenerative Lou Gehrig's disease at the age of 21. He lost his power of speech and for decades has talked through an electronic speech synthesizer. The device has allowed him to continue his research and attain a top Cambridge research post, which was previously held by Newton. His most famous theory explains how black holes emit radiation, according to The Guardian.

So if everyone is destined to power-down like computers at the end of their lives, what should humans do to lend meaning to their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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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us views of Stephen Hawking"

In his early work, Hawking spoke of "God" in a metaphorical sense, such as in A Brief History of Time: "If we discover a complete theory, it would be the ultimate triumph of human reason — for then we should know the mind of God." In the same book he suggested the existence of God was unnecessary to explain the origin of the universe. His 2010 book The Grand Design and interviews with the Telegraph and the Channel 4 documentary Genius of Britain, clarify that he does "not believe in a personal God". Hawking writes, "The question is: is the way the universe began chosen by God for reasons we can't understand, or was it determined by a law of science? I believe the second." He adds, "Because there is a law such as gravity, the Universe can and will create itself from nothing."

His ex-wife, Jane, said during their divorce proceedings that he was an atheist. Hawking has stated that he is "not religious in the normal sense" and he believes that "the universe is governed by the laws of science. The laws may have been decreed by God, but God does not intervene to break the laws." Hawking compared religion and science in 2010, saying: "There is a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religion, which is based on authority [imposed dogma, faith], [as opposed to] science, which is based on observation and reason. Science will win because it works."

In an interview published in The Guardian newspaper, Hawking regarded the concept of Heaven as a myth, stating that there is "no heaven or afterlife" and that such a notion was a "fairy story for people afraid of the dark." should seek the greatest value of our action," Hawking told the paper.

Monday, May 9, 2011

감동의 글 (생활수기 당선작) - 어머니 날을 기하여-



미국에서는 5월8일이 어머니날이다.
이날이 한국에서는 어버이 날이기도 하다.
어머니 젊었을때 이사진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온가족을 위하여 고생만 하시다가
좋은 세상 못보시고 떠나가신 어머니 효도 한번 못해보고
저승에서나마 꼭 효도 할게요.

Dear My family members:


이수기을 읽으면서, 옛 고난의 세월을 회상 하고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이글을 보내니 ---나는 그래도 이런 사람보다 훨씬 낳은 환경속에서 역경을 헤처 나왔으니 나를 오늘이 있게 해주신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조상님들께 께 감사 드립니다. 특히 할머니께서 특별한 사랑으로 이승 이나 저승 에서 저의 건강을 지켜주신것 감사드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이 남아있는겄이 없으니 안타갑기 짝이 없읍니다.

5월은 어버이 날이 있는 달이기도 하니 Happy Mother and Father's Day 되도록 하자구나.

미국 에서 숙부 가
201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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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수기 당선작)[감동의 글]

자연의 다양함과 같이 인간의 삶도 다양하지만
너무도 감명 깊은 글이기에 .
가슴에 전류가 흐르는 뜨거운 글, 꼭 읽어 봐 주세요.
[감동의 글] -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 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에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 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나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질을 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다.
하지만 난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 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 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 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렸다.
'엄마. 엄마……. 나 합격 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있던 형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우리 가족 셋은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북받치셨는지
국밥 한 그릇을 다 들지 못하셨다.
그저 색 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 텐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은 고운 분이다.
그토록 ! 모질게 엄마를 때릴 만큼 독한 사람은 아니었어.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둔 애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일 찍 아버지께 가 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위로 올라가다가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서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온 몸이 아팠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잠시 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 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 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렀는데
여학생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절룩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봐
주머니 속의 동전만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흰 연습장 위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꽃등처럼 환히 나를 깨어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지금 형은 집안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 시간씩
큰소리로 더듬더듬 책을 읽어 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오늘도 나는 온종일 형을 도와 과일 상자를
나르고 밤이 되서야 일을 마쳤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는
너무도 아름다운 말이다.

*** 위의 글은 10 년 전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에서 고른 글이다.

그 후 이 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우주항공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에 있으며
국내의 굴지 기업에서 전부 뒷바라지를 하고 있으며
어머니와 형을 모두 미국으로 모시고 가서
같이 공부하면서 가족들을 보살핀다고 한다.

이글은 한번만 읽기보다는 두서너 번 읽을수록
가슴에 뜨거운 전류가 흐른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울 적에
올라가던 암벽에서 생명줄인 밧줄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 우리사람들은 사랑이나 행복. 성공을
너무 쉽게 얻으려고 하고
노력도 해보기전 너무도 쉽게 포기하려고 한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이런 글에서 배워야 하리라.

한 학생의 생활수기임니다.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