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0, 2013

나의 기억을 더듬어서 -1

한국나이로 금년 삼월이 지나면 80세가 된다 ( 80세가 되면 산수(傘壽) 라고 한다).
후세들 에게 어떻게 인생를 사러 왔는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서 시간 나는대로
기술 고저 한다.

나의 유년기 시절


사람은 long term memories 와 short term memories 로 구분 하여 뇌에 저장 site
가 다르다고 한다. 2~3 살 때 기억은 생생한데 최근 기억은 깜박 해서 치매 시초가 아닌가. 의심이 되어서 뇌신경과 에서 진단을 받아보니 검사결과 고혈압 치료제 영향으로 뇌혈관으로 혈유가 약해저서 기억이 오래 저장이 안 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니까 바로 밑에 도생 (승욱) 와 4살 터거리니까 2~3 세쯤 되었으리라 기억 되는데 사내 동생이 출생 하였는데 산징기 라고해서 어린아이 불알이 부어올라서 불알에 계란을 발라준 기억이 나고 약 일 주후에 죽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 얼마 후에 승욱 동생이 출생 하여 큰방에서 할머니와 어머니 와 누나와 같이 자다가 사랑방으로 쬬겨나서 아버지와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사랑방에서 지냈다.

4~5 세쯤 되었을 때 로 기억난다. 사랑방 벽장에 꿀단지 두 개가 있었는데 여름이 되면 수분이 증발하여 딱딱한 종이로 꿀를 떠먹곤 하였다. 장기간 떠서 먹으니 자연적으로 축이날 수박에 없었다. 어머니께서 꿀이 필요해서 단지를 열어보니 상당량의 꿀이 없어진 게 아닌가, 죄 없는 두형들만 야단을 맞았는데, 하루는 큰형이 나한테 혁구야 사랑방 벽장에 무엇을 가져 오너라 시켰다. 나는 멋도 모르고 책상을 밀어붙이고 책상을 밟고 벽장을 올라가서 원 하는 것을 갖다 주었으니 들통이 난 것이다. 어머니는 그 어린것이 어떻게 벽장을 올라 갈수 있어서 꿀을 훔쳐 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 하시였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己卯年 흉년이 기억이 난다. 서기는 1939년 이고 내 나이 만 5살 때다. 흉년이 들어서 논에 모를 내지 못하여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민 했다고 하였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밭농사는 할 수 있었어 보리 와 밀을 수확 할 수 있어서 다행 이였고 과수원과 묘목을 재배해서 동내에서는 제일 낳은 편이 이었다. 동내라고 해야 반수가 우리 일가이고 우리만 혼자 밥 먹고 살수 없는 처지 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밀을 갈아서 큰 가마솥에 풀 대죽을 쑤어서 마당에 멍석을 펴고 온 동내 사람들을 불러서 식구마다 바가지를 갖이고 와서 퍼먹고 해서 이기묘년 흉년을 지날 수 있어서 큰 다행이 이었다. 이때 동네 아주머니들이 풀 대죽이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고 회상 하곤 했다. 이때 어머니, 할머니께서 베푸신 은덕으로 우리 집안이 6,25 공산치하에서 우리 가정이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논농사를 지어 봤자 5활은 공출 (현물세금) 으로 갔다 바쳐야 하는 시대다. 내가 취학 전으로 여겨지는데 5살쯤 되었으리라 생각 되는데 그 당시 나락가마를 소달구지에 실고 면사무소에 갔다 바쳐야 했다. 이때 머슴 (고용인, 김봉근) 이 소달구지에 잔득 실고 면사무소에 갔다 바치러 가는데 따라간 기억이 난다 면사무소 옆에 양조장 (황원택 부친, 황호성씨 소유) 을 갔는데 맑은 물이 담겨져 있는 큰항아리를 큰 몽둥이로 저으니 막걸리 가 되는겄 아닌가, 야 신기하도 하다 저 몽둥이만 있으면 막걸리를 무한정 만들 수 있지 않나 하고 여긴겄이다. 면사무소 위 언덕에 주막이 있었는데 우리 집 머슴은 들어가 술타령을 하고 나는 소달구지에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않나오니까 우리 소가 슬그머니 밧줄을 단겨서 풀고 집으로 향해서 제가 알아서 우리 집으로 십리길 을 혼자 온겄이다. 그러니 집에서는 난리가 난 것이다. 어린아이 와 소만 집에 왔으니 그럴 수밖에.

창오소학교 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