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25, 2011

대학지도


여기에 나오는 이문구는 대학에 첫구절인데 이구절은 나에게 보편적 윤리관 (중용지덕)을 정립 해주는 지주가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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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之道

대학(大學)정말 좋은 책입니다.. 꼭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고 在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大學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善에 머무름에 있느니라...

위의 3가지 명명덕.신민.재지어선 이것은 대학(大學)의 세강령입니다..

1. 명명덕(明明德)
맹자께서 말씀한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불쌍한 처지를 가엾게 여기고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사양할줄알고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네 가지 마음의 단서를 타고났으니 이것이 겉으로 나타나면 곧 인의예지(仁. 義. 禮. 智)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본성은 선한 것이지만 후천적으로 악하게 되는것....
명명 덕이란 이 인의예지와 같은 밝은 덕을 닦고 길러내어 환경이나 욕심으로 말미암아 흐려짐이 없게 함인 것..

2.신민
나의 밝은 덕으로 사람들의 덕을 새로워지게 해야 한다.
여기에서 새로워지게 한다라 함은 이제까지 지니고 잇던 악함을 버리고
본래의 선한 본성으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뜻이다..
한사람의 높은 인격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게 마련
앞에서 본바와 같이 자신의 타고난 밝은 덕을 밝혀 몸에 가득차게 되면
그의 아름다운 덕은 몸에서 넘쳐 흘러나와 가정과 집안에 번지고 이웃과 온 나라에 번지고 나아가서는 온 인류에게까지도 번져나가 모든 사람의 덕을 새로워지게 감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3. 지어지선(止於至善)
지극한 선에 머물라 ..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어선이란 최고의 착함이 아니다
어선이란 하늘의 이치에 가장 당연한 경지 ... 즉
조금도 기울고 치우치거나 지나치고 모자람이 없는 중용의 덕인 것이다
결국 재지어선 이란 이와 같은 중용의 덕에 언제나 머물러 있어 잠시도
여기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위의 세 가지가 大學의 총론적인 강령임..가장 핵심인 것이죠..!!

[제가 좋아하는 글귀 한 구절 적어드립니다..]
소설 丹 에 나와 있습니다.
.
去去去中知 (거거거중지) - 가고 가고 가는 가운데 알게 되고
行行行利覺 (행행행리각) - 행하고 행하고 행하는 가운데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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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사건과 정신교육

1945 8 15일에 해방이 되고서 중학교 학생이나 소학교 학생이나 똑같이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 했다. 그 다음해 1946 9월에 군산중학교에 입학 하고서 단독정부수립 반대, 학기말 시험반대, 교장선생 반대, 무엇이든 반대 하는 동맹휴학을 남로당 지령으로 학교가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이런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이였다. 학교 가는 길목 마다 상급생들이 길을 막고서 등교를 저지 하는 바람에 형님이 에스코트 까지 하는 풍경도 벌어지곤 하였다.

1948 10 19일에 여수, 순천 14연대 반란사건이 터지고 잠시나마, 좌익 반군세력이 여수 순천을 장악 할때 좌익 학생들이 교장선생님을 잡아다가 타살한 사건이 신문에 보도 되였는데 그때당시 君師父 一體 라는 교육이염에 반한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아버지께서 는 이런 윤리를 한탄 하시며 너이들은 학교에서 물질교육만 받고 정신교육을 못 받아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너는 나로부터 정신교육을 집에서 받아야 한다고 하시며, 중학교 2학년 겨을 방학 때 小學 과 大學을 익혔다. 그 당시 소학과 대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워야 책을 띠었다고 말 할 수 있었다. 한 달여 만에 두 권의 책을 달달 외웠으니 아버지께서는 상당히 흡족 해하신 기억이 난다. 지금은 머릿속에 남는겄이 별로 없지만--

여수·순천 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ko.wikipedia.org/wiki/%EC%97%AC%EC%88%98%C2%B7%EC%88%9C%EC%B2%9C_%EC%82%AC%EA%B1%B4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간단히 여순 사건) 한국전쟁 발발 2년 전이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 10 19,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 명의 사병이 전라남도 여수군(현재 여수시)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우익세력으로부터 전남동부지역의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부 진압군경이 여순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이 학살되는 경우가 많았다.[1]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 과거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서 1995부터 여수·순천 사건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Monday, January 24, 2011

四書 大學 편 2-2, 제6장 誠意;--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니라

大學 편 2-2, 제6장 誠意 에 나오는 이문장은 대학을 배운후 선친께서 저에게 늘 외워서 매일 거울을 보드시 이문장을 외우고 거울 보드시 하여 수신하는데 거을로 삼고 항상 必愼其獨也을 하라고 가르치시였다. --------- --------- -------- --------- -------- -------- -------- ------- 

 四書 大學 편 2-2, 제6장 誠意 에서 "小人은 閒居에 爲不善하되 無所不至.하다가.見君子而后.에 厭然揜其不善하고 而著其善하나니 人之視己는 如見其肺肝然이니 則何益矣리오. 此謂誠於中이면 形於外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니라." 소인(小人)은 한가히 있으면 선하지 못한 짓을 하되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가, 군자를 본 뒤에는 슬며시 그 선하지 못함을 가리고서 그 선함을 드러내거니와, 남들이 자기를 보는 것이 마치 그 폐와 간까지 드려다 보듯 하나니, 그러니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를 일러 "안에서 진실하면 밖으로 나타난다" 고 하거니와,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의 마음을 조심하느니라.

 [字意] *閒; 한가할 한, *居; 살 거, 거처할 거. *厭; 싫을 염(싫어할 염). *揜; 가릴 엄. 俺과 같음. *著; 나타낼 저. *視; 볼 시. *己몸 기, 자기 기. *肺; 폐 폐. *肝; 간 간. *形; 나타날 형,(형상 형) [語意] *閒居; 한가히 거처함, 남이 보지 않는 곳에 홀로 있음. *不善; 선하지 못함,(악함). *無所不至; 이르지 않는 바가 없음. 모든 악함을 가림.其는 대명사. *厭然; 슬쩍 가리는 모양. *揜其不善; 자기의 악함을 가림. 其는 대명사. *而; 그리고서, 접속사. *著其善;자기의 선한 점을 나타냄. *人之視己; 사람들이 나를 봄. *如見其肺肝然; 그 사람의 폐와 간까지 들여다 보듯이 환히 봄, 如然은 ~듯이 함의 뜻. *何益; 무슨 보탬이 있으랴, 무슨 소용이 있으랴. *誠於中; 속이(마음이) 진실함. *形於外; 겉으로 나타남.

 [原文解釋] 앞에서는 "성의(誠意)'란 스스로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삼가야 함을 강조 하였거니, 여기에서는 다시 이 주장을 발전시켜 악함을 아무리 남이 모르는 마음속에 숨길지라도, 그 악함은 절로 겉으로 나타나 세상 사람들 의 눈에 환히 드러나므로,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삼가야 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소인은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삼가지 못하여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데서는 악한 짓을 하여 온갖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다가 덕이 높은 군자의 태도를 보게 되면, 부랴부랴 자기 자신의 악함을 감추고 사람들에게 자기의 좋은 점을 드러내 보이려 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이를 바라보는 눈이란 마치 그의 뱃속에 있는 창자 속까지 훤히 들여다 보듯이 날카로운 것이니, 그의 이와 같은 숨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마음 속에 지닌 사 실은 겉에까지 나타난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만이 아는 홀로의 마음을 스스로 삼가야 하는 법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순 사건과 정신교육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고서 중학교 학생이나 소학교 학생이나 똑같이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 했다. 그 다음해 1946년 9월에 군산중학교에 입학 하고서 단독정부수립 반대, 학기말 시험반대, 교장선생 반대, 무엇이든 반대 하는 동맹휴학을 남로당 지령으로 학교가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이런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이였다. 학교 가는 길목 마다 상급생들이 길을 막고서 등교를 저지 하는 바람에 형님이 에스코트 까지 하는 풍경도 벌어지곤 하였다. 1948년 10월 19일에 여수, 순천 14연대 반란사건이 터지고 잠시나마, 좌익 반군세력이 여수 순천을 장악 할때 좌익 학생들이 교장선생님을 잡아다가 타살한 사건이 신문에 보도 되였는데 그때당시 君師父 一體 라는 교육이염에 반한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아버지께서 는 이런 윤리를 한탄 하시며 너이들은 학교에서 물질교육만 받고 정신교육을 못 받아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너는 나로부터 정신교육을 집에서 받아야 한다고 하시며, 중학교 2학년 겨을 방학 때 小學 과 大學을 익혔다. 그 당시 소학과 대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워야 책을 띠었다고 말 할 수 있었다. 한 달여 만에 두 권의 책을 달달 외웠으니 아버지께서는 상당히 흡족 해하신 기억이 난다. 지금은 머릿속에 남는겄이 별로 없지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수·순천 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ko.wikipedia.org/wiki/%EC%97%AC%EC%88%98%C2%B7%EC%88%9C%EC%B2%9C_%EC%82%AC%EA%B1%B4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간단히 여순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2년 전이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 명의 사병이 전라남도 여수군(현재 여수시)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우익세력으로부터 전남동부지역의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부 진압군경이 여순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이 학살되는 경우가 많았다.[1]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 과거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서 1995년부터 여수·순천 사건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친족 촌수 한자로 호칭 하기

정이 넘치는 바른사회 만들기 jeongsg21.egloos.com Egloos | Log-in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9년 01월 24일 친족 촌수 한자(漢字)로 호칭 하기 ▣ 

촌수(寸數)란 무었인가 ? 촌수(寸數)란, 친족간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체계이다. 우선 부부관계는 촌수가 없으며, 부자관계는 1촌, 형제관계는 2촌이 된다. 3, 4촌의 경우는 친족 호칭을 대신하기도 한다. 4촌은 [從/종], 6촌은 [재종], 8촌은 [삼종]간이다. 따라서 큰아버지의 자녀는 내게 종형제나 종자매가 되고 당숙의 자녀는 재종형재 자매가 된다. 이와 달리 고모의 자녀는 내종형제, 내종질 등 호칭 앞에 [內]자가 붙는다. 고종4촌은 내종숙, 그 자녀는 내종형제가 된다. 堂(당)은 오촌숙질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종형제의 자녀를 당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종자매의 자녀는 從甥姪(종생질)이다. 각 명칭에서 '叔(숙)'은 아저씨, 姪(질)은 조카, '嫂(수)'는 형제의 아내를 뜻한다. 

 민법상 친족은 8촌 이내의 혈족과 4촌 이내의 姻戚(인척), 배우자를 통틀어 말한다. 血族(혈족)에는 자기의 直系(직계) 尊卑屬(존비속) 즉 직계혈족과 형제,자매 및 그 형제 자매의 직계 비속인 傍系血族(방계혈족)이 있다. 인척에는 혈족의 배우자와 배우자의 혈족이 포함된다. 친족이란, 촌수가 가까운 사람들을 말한다. 법률상 배우자, 혈족, 인척을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배우자와 8촌 이내의 부계 혈족, 4촌 이내의 모계 혈족, 남편의 8촌 이내의 부계 혈족, 남편의 4촌 이내의 모계 혈족, 처의 부모 등을 이른다. 8촌의 기준은 고조까지 '4대 봉사'라 하여 제사를 모심으로써 서로 접촉을 유지할 수 있는 관계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외족이란, 어머니의 친정 일가로써 외조부.모, 외숙부.모, 이모.부, 외종사촌과 이종사촌을 포함한다.외숙부모와 이모의 자녀는 4촌간으로 외종형제 자매, 이종형제 자매가 된다. 10년 이상 연상인 조카에게는 '조카님', '일가어른', '일가양반' 또는 별호(別號) 등을 부른다. 사회적 지위를 부르기도 한다.같은 세대에서의 호칭이 가장 부담스럽지 않다. 속담에 "배안의 할아버지는 있어도 나이가 적은 형(兄)은 없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같은 세대에서는 나이가 위이면 '형님'이고 나이가 적으면 '이름'을 부르고'아우님', '여보게', '자네' 등으로 부르면 된다. 비록 나이가 아래라 하더라도'아우님'이나 사회적 호칭으로 불러서 대접하는 경우도 있다. 

◑연고항비(年高行卑)의 경우 상대가 나이는 나보다 위이지만 세대는 아래인 경우를 연고항비라고 한다.세대도 위이거나 같거나 하고 나이도 위이면 편하게 부르고 대접하겠지만 연고항비의 경우는 까다롭다. 이런 때는 아랫세대의 사람은 웃세대의 사람을 나이에 관계없이 웃세대로 대접해 '아저씨', '대부'라 부르며 높임말을 쓰고, 나이가 적은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세대에 관계없이 '하세요'의 높임 말씨를 대접하면 된다. 나이가 많은 조카와 나이가 적은 아저씨의 올바른 대화는 이렇다. "아저씨, 언제 오셨어요?" "조카님 뵈올려고 오래 전에 왔습니다." 

◑일가간의 호칭, 지칭어 면족지친의 일가의 할아버지 세대에게는 '대부(大夫)', '족조(族祖)'라고 부르고 자기를 가리킬 때는 족손(族孫)이라고 말하고 대상자를 남에게 지칭할때는 비족대부(鄙族大父)라 하며 남이 나에게 족조를 말할 때는 귀족대부(貴族大父)라고 한다. 여기서 비(鄙)는 자기를 낮추는 말이고 귀(貴)는 남을 높여서 하는 말이다. 일가간으로서 족숙(族叔)항렬은 '아저씨,족숙주(族叔主)'라 부르고 자기를 일컬을 때는 족질이라 한다. 족형(族兄)은 형제 항렬로서 '형님', '족형'하고 부르면 되고 자기를 지칭할 때는 족제(族弟)라 하며 족제를 부를 때는 '동생', '아우'하고 말하고 자기 자신을 일컬을 때는 '족형'하고 대상자를 타인에게 이야기할 때는 '비족제'라고 하면 된다. 

▣ 촌수 계산하는 방법 ◑ 형제간의 촌수 계산법 형제라 하면 같은 항렬(行列)을 총칭하는 말로서 형제는 2촌, 4촌, 6촌, 8촌, 20촌 등 다양하다.형제간에는 다음 요령으로 그 촌수를 계산하면 된다. 예를 들어 증조부(曾祖父)에서 계열(系列)을 달리하는 형제중 촌수가 가장 먼 형제가 6촌인데 이 육촌 됨을 계산하는 방법은 형제의 기본 촌수가 2촌이며 증조부의 나의 삼대조(三代祖)이니 3촌의 3대조의 대수 삼을 곱하면 6촌이 된다. 할아버지는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는 사촌간이 된다. 

◑윗대 촌수 계산법 아버지의 사촌 형제가 나와는 몇 촌인가는 아버지의 사촌에다가 아버지와 나는 1대이니 1을 더하면 촌수가 5촌이 된다. 고조부의 6촌 형제는 고조부의 6촌의 6에 고조부와 나와는 대로 4이니 4를 더하면 10촌이 된다. 같은 할아버지 자손이 만났을 때 그 할아버지가 나에게는 13대조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할아버지에게는 16대조가 된다면 그 사람은 나의 증손 항렬에 되는 데 나와는 촌수를 계산하는 방법은 다음 두 가지가 있다. 2촌 * 13대조 = 26촌 ... 26촌 + 3 = 29촌 2촌 * 16대조 = 32촌 ... 32촌 - 3 = 29촌 즉 형제의 기본 촌수 2와 자기와의 대수를 곱하면 자기 항렬 촌수이다. 이 두 사람의 대수의 차이가 3대이니 계산 방법에 따라 3을 빼는 경우도 있다. 

▣ 호칭(呼稱) 시조(始祖)를 1世로 해서 자기까지 내려온 世數(세수)를 行列(항렬)이라 한다. 항렬이 같은 사람끼리는 동항(同行)이라고 하여 형제뻘이 되고, 일세(一世) 위는 숙항(叔行), 이세(二世)위는 조항(祖行) 할아버지뻘이 된다. 밑으로 일세(一世) 아래가 질항(姪行; 조카뻘), 이세(二世) 아래는 손항(孫行)이다. 친인척을 통틀어 같은 항렬간에는 서로 [형님][아우님], 숙항과 질항간에는 [작은아버지][큰아버지][아저씨][조카][질녀]로 부르지만 10년이상 연상인 조카는 [조카님] 또는 사회적 직위를 부른다. 조항과 손항간은 [할아버지][손자]로 부르지만 팔촌이 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대부]나 [대모]라고 부른다. 시댁에서 첫 명절을 맞는 새댁일 경우 시댁 식구를 부를 때 호칭에 특히 조심해야 한다. 시부모등 웃어른 앞에서 남편을 부를 때 출산전에는 [그이]가 무난하고 아이가 있을 때는 [아무개 아비]로 부르면 된다. 남편형제에게 남편을 말할 때는 시동생에게는 [형님] 시누이에게는 [오빠]로 부른다. 또 남편의 형은 [아주버님], 남동생은 [도련님] 또는 [서방님], 남편의 누님은 [형님], 여동생은 [작은아씨]가 알맞다. 

 남에게 말할 때는 [시아주버니] [시숙] 또는 [시동생] [시누이] 이다. 이외의 호칭은 남편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부르면 된다. ◑호칭에 사용되는 낱말 대(代):가계나 지위의 대물림 순서를 아래로부터 위로 계산해 갈 때의 단위로서, 대수를 셈하는 방법은 촌수를 셈하는 방법과 동일하여 아버지는 나의 1대 선조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위에서 아래로 셈할 때도 사용된다 면례(緬禮): 무덤을 옮기고 다시 장사지 내는 일 밀례(사투리) 면봉(緬奉): 면례의 높임 말 (緬: 멀다, 아득하다, 다하다) 종친(宗親) : 

성과 본이 같은 일가 방계 촌수 : 혈족의 일방으로부터 공동시조에 이르는 대수와 공동시조로부터 다른 일방에 이르는 대수를 通算 (=合算)하여 계산한다. 본관 본향(本貫=貫鄕): 시조(始祖)가 태어나 삶의 본거지로 삼은 곳 .줄여서 본(本)이라고도 한다. 본적(本籍): 호적법에 따라 호적이 관리되고 있는 곳으로서 같은 호적에 올라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일가(一家)라 하고, 그 구성 원을 한 가족이라고 한다. 세(世):가계나 지위의 대물림 순위를 위에서 아래로 계산해 갈 때의 단 위로서 世數를 셈하는 방법은 촌수를 셈하는 법과 다르다. 즉 대수에 1을 더한 것을 세수로 한다. 따라서 나는 아버지의 2세 손( 1대손), 할아버지의 3세손( 2대손)이 된다. 세대(世代): 선대후세(先代後世;선조는 代로 나타내고, 후손은 世 로 나타냄)를 줄인 말로서 혈통으로 보아, 한 代가 다음 代로 바뀌기까지의 활동기간을 말하며 대개 30 년으로 본다. 

 시제[時祭=시향(時享)]: 음력 2, 5, 8, 10월에 조상의 산소에 가서 드리는 제사 일가(一家) : 성과 본이 같은 겨레붙이로 촌수를 따지기 어려운 한 집안 사이를 이른다. 원적(原籍): 새로 본적을 바꿔 옮겼을 때 즉 전적(轉籍)하였을 때 옮기기 전의 옛 본적을 말한다. 종가(宗家): 맏이 파의 집안(=큰집) 종친(宗親) : 성과 본이 같은 일가(一家)를 말한다. 종친회(宗親會) : 동성동본 일가붙이의 모임으로, 종문회(宗門會) ,화수회(花樹會)라고도 한다. 직계 촌수 : 단순히 그 사이를 이어주는 親子의 代數를 계산한다. 촌(寸) : 친족관계의 긴밀도를 측정하는 척도의 단위 ,촌(寸)은 원래 손목에서 손가락 두개 너비(약 3.03㎝)쯤 떨어져 있는 맥박 뛰는 곳(=촌구맥)까지의 거리를 가리키 는 말.<1 1="" 3.03="" 30.3=""> 촌(=親等)수 : 혈족 사이를 이어주는 親子의 대수(代數)를 말한다. 
<1 1="" 3.03="" 30.3="">
<1 1="" 3.03="" 30.3="">항렬(行列): 방계혈족에 대한 대수(代數), 세수(世 數)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항렬의 차이는 해당 직계 혈 족과의 촌수에 상응한다. 홀수차(差) 항렬 ⇒항렬의 차이가 홀수 차이가 나는 항렬으로서 존속으로는 아버지, 증조할아버지, 5 대조 할아버지 라인이고, 비속으로는 자녀, 증손자녀, 래손자녀이다. 짝수차(差) 항렬 ⇒항렬차가 짝수차가 나는 항렬으로서 존 속으로는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라인이고 비속으로는 손자녀, 현손자녀 이다. <위 홀수차, 짝수차 항렬 라인의 개념은 친족 명칭을 보고 몇 촌 지간 인지를 알아낼 때 매우 긴요하게 쓰이는 것에 유의해야 한 다. 예컨대 종숙이라면 어근이 숙(叔), 즉 아버지 뻘로서 홀수차 항렬라인이므로 촌수칭 접두사 종이 4, 5 촌을 한꺼번에 나타내 는 접두사라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5촌지간임을 알 수 있고, 반 면에 종조부는 어근이 조부, 즉 할아버지 뻘로서 짝수차 항렬라 인이므로 접두사 종이 4촌과 5촌을 모두 나타낸다 하더라도 여 기서는 4촌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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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3.03="" 30.3=""> 항렬자(行列字): 항렬, 즉 代數대수, 世數세수상의 서열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름 속에 넣는 돌림자(오행상생의 원리에 따라 종친회에서 미리 정하여 족보에 올려놓는다. 그래서 호적상의 법률상 이름과 족보상의 사실상 이름이 다른 경우가 많다) 동항(同行): 자기와 같은 항렬, 즉 형제자매 뻘의 항렬<짝수차(직계 0촌뻘) 항렬 라인> 손항(孫行): 손자와 같은 항렬,<짝수차(직계 2촌뻘) 항렬 라인> 숙항(叔行): 아버지와 같은 항렬, <홀수차(직계 1촌뻘) 항렬 라인> 조항(祖行): 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짝수차(직계 2촌뻘) 항렬 라인> 질항(姪行): 조카와 같은 항렬, 즉 자녀 뻘 항렬<홀수차(직계 1촌뻘) 항렬 라인> 
<1 1="" 3.03="" 30.3="">
<1 1="" 3.03="" 30.3="">◑ 친척 인척 호칭에 쓰이는 명칭 ▷유복지친(有服之親 ; 상을 당할 때 복(服)을 입는 가까운 친족) 백부(伯父)=세부(世父;집안의 대를 잇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백부를 이름) ; 조부(祖父)의 장자로 곧.큰아버지를 이름 /백모(伯母)=세모(世母) ; 백부의 아내. / 중부(仲父) : 아버지의 중형. /중모(仲母) : 중부의 아내. / 숙부(叔父), 계부(季父). 아버지의 동생. /숙모(叔母) : 아버지 동생의 아내 고모(姑母) : 아버지의 여자 형제 / 고숙(姑叔) ; 고모부(姑母夫)를 이름 형수(兄嫂) : 형의 아내. /제수(弟嫂) : 동생의 아내 자(姉) : 누님 . 손위 누이. / 매(妹) : 여동생. 손아래 누이 자형(姉兄) ; 여형제의 배우자 질(姪),/ 생질(甥姪),/ 당질(堂姪),/ 재당질(再堂姪) ; 각각 형제, 누이, 내종형제.매, 재종형제.매의 자식 손(孫),/ 외손(外孫),/ 종손(從孫),/ 재종손(再從孫),/ 삼종손(三從孫) ; 아들, 딸, 조카, 당질, 재당질의 자식질(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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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3.03="" 30.3=""> 조카. 형제의 아들. /질부(姪婦) : 조카의 아내 내종형제(內從兄弟) ; 고모의 아들 /, 내종매(內從妹) ; 고모의 딸로 흔히 고종 사촌이라고 함. 종손(從孫) : 형제의 손자. /종손부(從孫父) : 형제의 손부 종형제(從兄弟) : 백숙부모의 아들. /종자매 (從姉妹) : 백숙부모의 딸로 나와 친사촌간임 당질(堂姪) : 종형제의 아들./ 당질부 (堂姪婦) : 당질의 아내 재종형제(再從兄弟) ; 육촌 형제, /재종매(再從妹) ; 육촌 자매 사이 재종손(再從孫) : 종형제의 손자 종조부(從祖父) : 할아버지(조부;祖父)의 형제. /종조모(從祖母) : 종조부의 아내 대고모(大姑母) ; 할아버지의 여자 형제. /대고숙(大姑叔) 대고모부(大姑母夫) ; 대고모의 남편 당숙부모(堂叔父母) ; 종조부모의 아들 부부 당숙(堂叔) : 아버지의 종형제. /당숙모(堂叔母) : 종숙모(從叔母)를 친근하게 일컫는 말.당숙의 아내 재종형제(再從兄弟) : 당숙의 아들. /재종자매(再從姉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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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3.03="" 30.3=""> 당숙의 딸 / 재당질(再堂姪) : 재종형제의 아들 재종조부모(再從祖父母) : 아버지의 당숙과 당숙모 재당숙(再堂叔) : 아버지의 재종형제 재당숙모(再堂叔母) : 재당숙의 아내 삼종형제(三從兄弟) : 팔촌 형제.아버지의 재종형제에게서 난 자녀. /삼종자매(三從姉妹) : 재당숙의 딸 종증조부(從曾祖父) : 증조의 형제 /종증조모(從曾祖母) : 종증조부의 아내 왕고모(王姑母) : 아버지의 고모 / 종고모(從姑母) : 아버지의 종자매 재종고모(再從姑母) : 아버지의 재종자매 / 종증조고모(從曾祖姑母) : 증조의 자매 현손(玄孫) : 손자의 손자. =고손(高孫)증손자의 아들. /현손부(玄孫婦) : 현손의 아내 ▷면복근친(免服近親 ; 상복을 입지 않는 종속) 삼종(三從) ; 

<1 1="" 3.03="" 30.3="">(三從兄弟; 팔촌 형제. 한 고조(高祖)의 후손.아버지의 재종형제에게서 난 자녀)의 준말 삼종조부(三從祖父) : 아버지의 재당숙 /삼종조모(三從祖母): 아버지의 재당숙모 삼종형(三從兄) ; 팔촌 형 /삼종제(三從弟) ; 팔촌 동생 /삼종매(三從妹) ; 팔촌 누이 삼종자(三從姉) ; 팔촌 누이 /삼종매부(三從妹夫) ; 팔촌 누이의 남편 삼종수(三從嫂) ; 팔촌 형제의 아내 삼종숙(三從叔) : 아버지의 팔촌(삼종)형제 구촌 아저씨 /삼종숙모(三從叔母) : 삼종숙의 아내 삼종질(三從姪) : 팔촌(삼종)형제의 아들. 구촌 조카 / 삼종손(三從孫) : 칠촌 조카의 아들. 육촌 형제의 손자. 재종형제의 손자 삼종(三從)이 넘는 일가는 촌수(寸數)가 없고, 조부(祖父)의 항렬(行列)에 해당되면 대부(大父)라 하고,아버지의 항렬은 족숙(族叔)이라 하고, 형제 항렬은 족형(族兄), 족제(族弟)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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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3.03="" 30.3="">항렬은 족질(族姪)이라 하고, 항렬이 분명치 않을 때는 종씨(宗氏), 존장(尊長)이라 한다 [혼인으로 인하여 생기는 관계] ◑아버지(부;父)로 인하여 맺어진 관계 고모부(姑母夫) : 고모의 남편 내종(內從) : 고모의 자녀.고종 사촌. =姑從(고종) / 내종질(內從姪) : 내종의 아들 자형(姉兄) : 누님의 남편 / 매부(妹夫) : 여동생의 남편 생질(甥姪) : 여자 형제의 아들 / 생질녀(甥姪女) : 여자 형제의 딸 ◑ 어머니(모;母)로 인하여 맺어진 관계 외조부(外祖父) : 외왕부(外王父). 어머니의 아버지 / 외조모(外祖母) : 외왕모(外王母). 어머니의 어머니 외숙(外叔) : 어머니의 오빠나 남동생 / 외숙모(外叔母) : 외숙의 아내 / 외종(外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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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3.03="" 30.3="">외숙의 아들,딸 외종숙(外從叔) : 어머니의 사촌 여자 형제 이모(姨母) : 어머니의 여자 형제 / 종이모(從姨母) : 어머니의 사촌 여자 형제 이모부(姨母夫) : 이모의 남편 / 이종(姨從) : 이모의 자녀 / 이질(姨姪) : 아내의 자매의 자녀 ◑ 남편(부;夫)으로 인하여 맺어진 관계 시부(媤父) /媤母(시모) : 남편의 아버지〔구(舅)〕와 어머니〔고(姑)〕 / 시숙(媤叔)?시매(媤妹) : 남편의 남자 형제와 여자 형제 ◑ 아내(처;妻)로 인하여 맺어진 관계 빙부(聘父) /빙모(聘母) : 아내의 아버지(장인,丈人)와 어머니(장모(丈母),악모(岳母),처모(妻母) 처백부모(妻伯父母)?처숙부모(妻叔父母) : 아내의 백부모와 숙부모 처남(妻男) : 아내의 남자 형제 / 처형(妻兄)?처제(妻弟) : 아내의 언니와 동생 / 처수(妻嫂) : 처남의 아내 / 처질 (妻姪) : 처남의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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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3.03="" 30.3="">◑ 기타 호칭 살아 계신 자기아버지 ; 가친(家親) 엄친(嚴親 / 살아 계신 남의 아버지 ; 춘부장(椿府丈) 춘정(椿庭) 존당(尊堂) 대인(大人) 춘당(春堂.椿堂)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 ; 선친(先親) 선고(先考) 선인(先人) / 돌아가신 남의 아버지; 선대인(先大人) 선고장(先考丈) 살아 계신 자기 어머니 ; 모친(母親) 자친(慈親) 가자(家慈) / 살아 계신 남의 어머니 ; 대부인(大夫人) 자당(慈堂) 북당(北堂) 훤당(萱堂)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 ; 선자친(先慈親) 선자(先慈) 선비(先비) 전비(前비) / 돌아가신 남의 어머니 ; 선대부인(先大夫人) 선자당(先慈堂) 남의 남편 ; 부군(夫君) / 남의 아내 ; 令夫人(영부인), 令室(영실), 閤夫人(합부인) 부인(夫人) 자기의 아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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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3.03="" 30.3="">妻(처), 內子(내자), 內堂(내당), 家人(가인) 자기의 아들 ; 家兒(가아), 家豚(가돈), 豚兒(돈아), 迷豚(미돈) / 남의 아들 ; 令郞(영랑), 令息(영식), 令胤(영윤) 자기의 딸 ; 女息(여식), 息鄙(식비) // 남의 딸 ; 令愛(영애), 令嬌(영교), 令孃(영양) 친한 벗 ; 大兄(대형), 仁兄(인형) 남의 형 ; 伯氏(백씨) / 남의 아우 ; 季氏(계씨), 弟氏(제씨) 손윗 누이의 남편 ; 姉兄(자형), 妹兄(매형), 姉夫(자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 구고(舅姑) / 시어머니와 며느리 ; 고부(姑婦) / 장인과 사위 ; 옹서(翁壻) 여동생의 남편 ; 제부(弟夫),매제(妹弟) / 형의 아내 ; 형수(兄嫂) 어머니의 여동생 여동생 남편 ; 이모(姨母),이숙(姨叔) ◑삼족(三族)과 그 별칭(別稱) 族(족)--宗族(종족),外族(외족),妻族(처족) 家(가)--親家(친가),外家(외가),妻家(처가) 黨(당)--父黨(부당),母黨(모당),妻黨(처당) 親戚 --宗親(종친),外戚(외척),姻戚(인척) 갈래 --親族(친족),戚族(척족),戚族(척족)

선친에 대한 나의 기억

선친에 관한 나의 기억

선친의 소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시다가 일제 학교 선생이 순사복을 입고서 칼을 차고 서당소년들을 잡아다가 머리를 깎이고 일제교육을 시키는 시대에 선친도 잡혀서 머리를 깎이고 임피소학교을 4년제 소학교를 3년에 마치시고 관비로 전주농업학교을 마치신후 전남 각 오지로 군청 산림계로 발령이 나서 진도, 완도, 장성 (큰누나 출생), 그리고 나의 출생지는 광양 등으로 전전 하시였든 것으로 들었다.

내 가 생후100일이 지나서 관직을 그만두시고 전남 광양에서 현 고향으로 돌아오신 이유는 일제 강점기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을 세우고 조선의 토지을 수탈고저 1920년대 말에 총독부 게시판 에 각자소유 토지을 등록 하도록 총독부게시판에 공고를 했었는데 그 당시 사정으로는 시골에서 신문 보는 사람도 거의 없을 때인데 어떻게 그 소식을 안자는 남의 땅을 자기 앞으로 등록 하면 자기 땅이 되는 세상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안골에 대종중 선산 옆에 채 씨네 선산이 나란히 있었는데 이 채 씨들이 우리선산을 채 씨네 땅으로 등록이 되었으니 우리종중 에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한다. 재판을 걸어서 찾아야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당시 신학문을 한사람은 문중에서 우리 아버지 밖에 없었든 형편이라서 종중에서 소환 령이 내려져서 관직 을 사직 하시고 귀향 하여서 재판해서 안골 선산을 찾았다고 아버지로부터 직접 나에게 전해주셨다. ( 만일 그대로 관직에 머물러 계셨다면 해방 후에 군수정도는 하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동네 雄九 형네도 그런 경우로 밭을 빼긴 경우가 되어서 아버지께서 밭을 찾게 해준 것으로 기억 한다.

창오소학교 (창오국민학교) 가 설립되기 전에는 두형과 누나는 다리실재을 매일 오르고 내리며 십리길 을 통학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주동이 되시여 창오소학교을 서립 하시어서 나는 다행이 다리실재를 넘지 않고 소학교을 다닐 수 있었다. 학교 후원회장 으로 오랜 세월 봉사 하시고 또 종중 에 종회장 으로 헌신 하신 것은 세상 사람이 다인정 하는 일인데 반세기가 지나고 내가 외국에 머물고 있으니 내놓을만한 자료를 없으니 죄송할 따름이오.

내가 소학교 3-4 학년 때 일인데 학교에서 선생님이 일본식으로 창씨개명 하라고 지시가 내려서 아버지 에게 우리는 어떻게 개명해요 여쭈었더니 우리는 창씨개명 않는다고 선생에게 전하 거라 하시였는데 그 당시 어떻게 못한다고 학교에 보고 할 수 없어서 아무 보고를 않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수차 재촉해서 할 수 없이 큰집 작은집 다 구니모도 (國本) 라고 하여 할 수 없이 “구니모도” 라고 보고해서 출석부에 國本 이라고 기록이 된 것을 학교에서 확인 하시고 선생님에 누구 맘대로 창씨개명 했느냐고 호통을 치시어 다시 국본에서 李 가로 원상회복은 되었는데 내가 거짓말 한게 문제가 되어서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부터 크게 혼이 낫고 또 집에서는 아버지로 부터 진통 혼이 난기 억 난다.

그 당시 종중에서 수차 회의를 해서 어떻게 할지 갑론을박 해봤자 결론이 않나 서 각자 알아서 하기로 결론이 낫는데 아버지께서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시고 그대로 성을 유지 하시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든다. 천만다행이도 소학교 6학년 때 (1945 815)에 해방이 되여서 망정이지 해방이 않되였으면 중학교 원서조차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집에서 일본 군가를 부르면 학교에서나 부르고 집에서는 절대 부르지 말라고 야단치신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버지, 형님들께서는 미군이 “오키나와” 을 점령 했으니 곧 조선반도에 상육 하면 우리 조선이 해방 된다고 좋아 하시었는데 이해가 잘 않되였다. 우리나라는 일본인데 왜 일본이 망해 가는데 아버지와 형님들은 기뻐하시는지?

지금 생각 하니 선친께서는 농촌계봉에 앞장 헌신 것으로 생각된다.
묘목을 재배해서 군, 면에 납품 뿐 아니라 산림녹화 에 헌신 하시고 우리 면에서 제일 먼저 고구마를 도입 재배 하여서 우리 산남부락을 고구마 부락이라고 별명이 붙었다.

지경 숙부님께서 생전에 항상 저한테 하신 말씀이 내생 전에 너의 아버지 비(공적비) 을 산남종중 재실 앞에 해 놓으시겠다고 하시였는데 소희재 건물을 못 보시고 세상을 뜨시어서 애석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경숙부님 께서도 세상을 뜨시고 선친의 공적이랄 만한 자료가 손에 없어서 선산에 잇는 묘비문 을 당질 근명 군에게 부탁 하여 번역 하여 여기에 실려 후손들이 읽어서 우리 선조께서 무엇을 남기시고 공헌 하시엿는지을 알리고자 한다.

선친의 비문

公諱平來 號田隱 籍全州李氏 我 太祖高皇帝第三男 諱毅益安大君 之十八代 孫也. 先考諱聖純字元國 妣濟州高氏致一女之第三男.
()의 이름은 평래(平來)이시고 호는 전은(田隱)이시며 전주이씨이시다. 조선 태조 임금의 제3남이신 익안대군 방의(芳毅)18대 후손이시다. 부친은 이름이 성순(聖純)이시었고 자()는 원국(元國)이시었으며, 모친은 제주 고씨인 고치일의 딸이시었다

公一九○一年辛丑正月八日生. 天性剛直 孝親敬長 崇祖敦睦 宗事誠力. 十六代祖考 大林都正 公諱綱 墓所失傳 累年推尋 以遂得考 徵與族人復元 致憤雪怨其恨矣. 日帝時代 恒念抗日 創氏改名終乃拒否 兼行地方敎育 産業發展獻身功勞至大 而 一九七三年 癸丑六月十三日卒壽七十三.
(공은 셋째 아들로서 신축년인 1901년 정월 8일에 태어나 시였고. 천성이 강직하고 부모에게 효성스러웠으며 웃어른을 공경하시였다. 또 조상을 잘 섬기고 일가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며 종친의 일에 열성을 다하시였다. 16대 선조이신. 대림도정 휘강의 묘소가 어디인지 전해지지 않았는데, 공은 여러 해 동안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증거를 확인하고 종중 사람들과 더불어 그 묘소를 복원하시였다. 이로써 종중 사람들의 분함과 원통함을 없애고 한을 풀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의 의지를 늘 지니고 있었으며 창씨개명도 끝까지 거부하시였다. 동시에 지방교육 및 산업의 발전에 헌신하시였는데 그 공로가 지대하시였다. 계축년인1973 6 13일에 73세의 나이로 작고하시였다. )

配崔賢伊 耽津崔東燁女 一八九八戊戌十一月二十五日生. 天性孝而仁 溫而恭 媤母久病 暫不離側 糞尿之除 供藥之節 自任其責. 姑舅所耆必求供進 以盡婦道 鄕薦于孝婦 事載郡誌. 一九五八年甲年 七月十八日卒.
부인은 탐진 최씨인 최동엽의 딸 최현이(崔賢伊)로서 무술년인 1898 11 25일에 태어나셨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마음씨가 따뜻하였으며 또 조신스러웠다. 시어머니가 오랫동안 와병하였는데 그 곁을 지키며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것이라든가 때 맞춰 약을 드리는 것 등을 당연한 자신의 일이라 여겼다. 시부모님들이 좋아하시는 음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서 바치면서 며느리된 도리를 다하시였다. 이에 인근 동리 사람들이 효부(孝婦)로 추천한 바 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군지(郡誌)에 실려 있다. 회갑을 맞던 해인 1958 7 18일에 작고하였다.

祖考諱仲濟 通政大夫中樞府事. 曾祖諱在馨以下三世墓 豊德山壬坐有世阡碑. 高祖諱炳斗 五世祖諱祥植 二世墓 在月谷杞溪副正公靑龍 有碑誌 宗中祔祭行祀矣.
조부 휘 중제(仲濟)는 통정대부로서 중추부사를 역임하시였다. 증조부 휘 재형(在馨)으로부터 13대 선조까지의 묘소는 모두 풍덕산에 임좌하고 있으며 모두를 함께 기리는 세천비가 세워져 있다. 고조부 휘 병두와 5세조 휘 상식의 묘는 월곡의 선영에 모셔져 있다. 월곡의 선영에는 기계부정의 묘소와 그 신도비가 있어 종중에서 함께 제사를 지낸다.
公之伯氏諱貴來 仲氏諱智來 弟京來昌來. 兄友弟恭 庭無間言 友愛甚篤矣.
공의 맏형은 휘 귀래(貴來)시였고 둘째 형은 휘 지래(智來)이시였으며 동생으로 경래(京來)와 창래(昌來)가 있었다. 형들은 자애롭고 아우들은 공손하여 집안에 아무 틈이나 소란이 없었고 서로 우애가 매우 도타웠다.
公生四男二女 長男英九 次南九爀九昇旭 女永春根春. 長男英九 婦耽津崔宗燮女玉蘭 生二男三女. 男喜彬喜潤 女眞玉適平康蔡洙德 次潤淑仁淑.
공은 4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영구(英九)이며 그 아래로 남구(南九), 혁구(爀九), 승욱(昇旭)이 있었으며, 딸로는 영춘(永春)과 근춘(根春)이 있었다.
장남 영구는 탐진 최씨 최종섭의 딸인 최옥란을 아내로 맞아 2 3녀를 두었다. 아들은희빈(喜彬)과 희윤(喜潤)이다. 딸 진옥(眞玉)은 평강 채씨 채수덕과 결혼하였으며, 그 아래로 윤숙(潤淑)과 인숙(仁淑)이 있다.

次男南九 婦南原梁河根女庚英 生一男三女. 男喜千 婦慶州李鳳雨女美淑 生一男根昌. 女連淑 適靑松沈英燮 次女賢淑 適慶州崔時鎭 季女珠美.
차남 남구는 남원 양씨 양하근의 딸인 양경영을 아내로 맞아 1 3녀를 두었다. 아들 희천(喜千)은 경주 이씨 이봉우의 딸인 이미숙을 아내로 맞아 아들 근창(根昌)을 두었다. 장녀 연숙(蓮淑)은 청송 심씨 심영섭과 결혼하였으며, 차녀 현숙(賢淑)은 경주 최씨 최시진과 결혼하였고, 이 외에 막내 딸로 주미(珠美)가 있다

仲男藥學博士爀九 婦義城金鎭悳女順玉 生一男一女 男喜星女珠利.
季男昇旭 婦安東權五幾女爀順 生二男秀勇東恒.
女永春 適道康金煥湜 生三男 長基瀅次基沃保先. 根春 適南原梁悳鎬 生一男石.
裔孫繁衍 不可盡錄
셋째 아들인 약학박사 혁구는 의성 김씨 김진덕의 딸 김순옥을 아내로 맞아 1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희성(喜星)이고 딸은 주리(珠利)이다.
막내 아들 승욱은 안동 권씨 권오기의 딸 권혁순을 아내로 맞아 2남을 두었다. 그 이름은 수용()과 동항(東恒)이다.
딸 영춘은 도강 김씨 김환식과 결혼하여 3남을 두었다. 장남은 기형이며 아래로 기옥과 보선이 있다.
둘째 딸 근춘은 남원 양씨양덕호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밖에 후손들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기록하지 않는다.

有日子女姪 立石穹龜 請文於余 雖老拙文 平素特殊 族親之情誼不可辭而遂爲之銘曰. 惟公擇善固執 擧擧服膺愛國抗日 惇宗和睦 扶綱植倫 敎育産業 終身獻力 莫非哀情 日月爭光永世無窮.
며칠 전 공의 후손들이 비석을 세우고저 내게 비문의 작성을 부탁하였다. 나는 늙고 문장력도 보잘것 없지만 평소 특별히절친하였던 일족의 청인지라 거절하지 못하고 이에 비문을 적는다. 삼가 돌아보건대 공은 선한 일만 택하여 실행에 옮겼으며, 또 이를 마음에 새겨 일거수일투족에 흐트러짐 없이 담아내고자 했다.
나아가 애국과 항일을 실천하고 문중의 일에 솔선하며 일족과 화목하였다. 삼강오륜의 도리를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며 교육과 산업
발전에도 종신토록 힘을 다 바쳤다. 그러니 일생에 충정이 아닌 것이 있었으랴? 그 충정이 해,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툴 것이니 영영 무궁토록 남을 것이다. . .

一九八八年戊辰春二月 日 族弟典校 炳來謹撰
1988년 무진년 춘2
일족의 동생인 전교 병래가 삼가 쓰다.

현각 스님이 왜 종교을 버리라고 했나!

Why][김윤덕의 사람人] 현각이 한국을 떠난 까닭은? 

[조선일보] 2010년 12월 11일(토) 오전 03:02 |공유하기 가 가 | 

이메일| 프린트 지난달 경기도의 한 조계종 선원에 '와~' 하고 환호성이 터졌다. 푸른 눈의 외국인 승려를 향한 것이었다. 사진을 함께 찍어달라는 요청도 쏟아졌다. 무시한 채 문을 나서려던 승려가 돌아서서 버럭 소릴 지른다. "이 못생긴 미국 상놈 봐서 뭐해요? 거울에 비친 당신 자신, '참나'를 봐야지!" 이틀 뒤 승려는 서울 방배동 불교TV 법회장에 나타났다. 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를 성큼성큼 가로지른 승려는 높은 단상 위로 몸을 날리더니 눈 깜짝할 새 가부좌를 틀었다. 승려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세상에서 이 자세가 제일 편해, 정말 좋아요." 현각(玄覺•46). 하버드대 출신의 선승(禪僧)이라 하여 세상 이목을 집중시켰고, 28세 꽃 같은 나이에 삭발하고 출가한 사연을 적은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출간, 한국 불교계에 일약 '스타'로 떠오른 승려. 동그란 금속테 안경을 쓰고 참선하는 그의 사진(김홍희 작)은 일반에도 선명히 각인되어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국내든 국외든 그가 여는 법회에는 수백 명의 대중이 몰렸고, 법회가 끝나면 그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랬던 현각이 돌연 한국을 떠났다. 2008년의 일이다. 명분은 '유럽 만행(萬行)'이었지만, 스님은 "스승이신 숭산스님이 입적(2004년)한 날부터 한국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고 했다. 가장 큰 이유는 "폭풍(perfect storm)처럼 몰아닥친 명성"이었다. "수행이 아니라, 그야말로 '쇼'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지요." 한국을 떠난 그는 유럽 만행을 거쳐 2009년 독일 뮌헨에 정착, '불이선원'이라는 선방을 개원했다. . 

 못생긴 미국 상놈 봐서 뭐해요? ―세계종교지도자대회에서 말씀을 너무 짧게 하시더라. 모처럼 스님 말씀 들으러 온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선승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대회에서) 프랑스에서 온 패널 한 분이 대단한 말씀을 하셨다. 종교는 신앙이 아니라 윤리로 가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우리는 종교를 버려야 한다. 평화 대신 전쟁, 갈등과 환경만 파괴하는 종교는 이제 버려야 한다. 2010년이 되었는데 인간이 여전히 종교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스님 또한 불교에 몸담고 계시지 않나. "이건 껍질일 뿐이다. 석가모니는 불자가 아니었다. 예수도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종교를 만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개신교의 가르침은 많은 부분 예수 이후에 생긴 것들이다. 

종교다워지려면 보편적 윤리, 사랑하고 베푸는 마음을 실천해야 한다." ―신앙이 아니라 윤리로 가야 한다는 말은, 예수나 부처에 대한 신격화 혹은 숭배를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형태일 뿐이다. 종교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생활에서 실천해 나갈 때 참종교가 된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말씀은 '나의 말을 믿지 마라, 내가 말했기 때문에 믿으면 안 된다'였다. 맹목적인 믿음은 종교의 독이다." ―

한국을 떠나셨나. "아까 보지 않았나. 법당에서 기도하시던 분들이 연예인이 온 줄 알고 달려나오더라. 내 죄다. 애초에 내가 무슨 계획을 세워서 유명해진 것은 아니지만, 수행자로서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매스컴을 통해 갑자기 유명해지니 법회, 특강, 주례, 인터뷰 요청이 줄을 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회의가 들었다." ―하버드 출신이라는 것,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이 폭풍인기에 한몫했다. "그래서 창피했다. 수행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야 하는데, 나의 겉모습은 사람들에게 유혹만 주었다. 일본에 아름다운 비구니 스님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면 사랑에 빠지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러자 비구니 스님이 칼로 자신의 얼굴을 난도질했다. 내가 그 비구니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 말라. 비슷한 심정이었다는 얘기다." ―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처음 하셨나. "2004년 숭산 스님 열반하시던 날. 바로 떠났어야 했는데 한국 불교의 세계화라는 은사 스님의 일이 안정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했다." ―한국 불교계와 갈등이 있었나. "그렇지 않다." ―일부에서는 현각을 마뜩잖게 여기는 한국 스님들이 적지 않았다고 하더라. "모르겠다. 만일 그랬다면 나의 스님답지 않은 언행,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법회할 때 하도 요란스럽게 하니까 주위에서 '스님이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말했다. 나는 한국 스님 되려고 온 거 아니다. 참나를 찾으러 왔다." ―스님은 늘 한국 불교를 예찬만 하시더라. 떠나 계시니 이제 쓴소리 할 때도 되지 않았나. "가르침만 받았다. 누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

그러지 마시고 한 말씀 해달라. "당신이 미국 우리 집에 와서 2~3주 살다 나가면서 저 집은 이렇더라 저렇더라 흉보면 우리 가족은 큰 상처를 받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선(禪)불교는 재즈다 폴 뮌젠이 본명인 현각은 미국 뉴저지의 보수적인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9남매 중 일곱째였던 현각은 예일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칸트,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등 독일 철학에 심취했고 쇼펜하우어를 통해 불교를 처음 접했다. 

하버드 재학시절 화계사 조실 숭산 대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한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스님 물음에 할 말을 잃자, '하버드 학생이 당신 자신을 모른단 말인가?' 하며 껄껄 웃으시더라. 완전히 다른 세계, 다른 코드였다." ―'만행' 책에 보니 유달리 총명했던 아들에게 부모님 기대가 엄청났더라. "삭발하고 처음 집에 들어간 날 부모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보단 불교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지만 아쉬움은 여전하시다. 어머니가 그러더라. 오바마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는데 그 뒤로 너의 동창 몇이 서 있더구나, 하고." ―

어릴 때 어떤 아이였나. "말썽꾸러기! 오늘날까지도. 난 반듯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공부는 잘하지 않았나. "음…. 누가 그림을 잘 그리듯이 난 공부를 잘했을 뿐이다. 어렵지 않았다. 내겐 '재미'와 '도전'이 중요했다. 착한 아이들은 어른들 말씀대로 살지만, 난 넘어지고 다치면서 배우는 걸 좋아했다. 남들 기대에 따라 사는 것, 예측 가능한 결과는 얼마나 재미없고 무료한가." ―정치를 하셨어도 잘했을 것 같다. 선동가 타입? "그런 말 많이 들었다. 글쎄. 정치를 했다면 나의 내면은 죽지 않았을까? 겉으로 멋져 보일지 모르지만 내 안에서 과연 행복했을까?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이나?" ―즐거워 보이신다. 에너지 넘치고. "보이는 대로다. 선불교는 재즈다. 선승의 생활은 재즈와 같다. 많은 종교들이 형식과 틀, 어떤 룰을 강조하는데 선불교는 다르다. 재즈처럼 자유롭고 즉흥적인 연주를 할 수 있다. 나는 선승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행복하다." ―불교가 재즈라니? "히피로서도, 예술가로도 자유롭게 살 수는 있다. 불교의 자유는 다르다. '작은 나'를 벗어나 남을 위해 자유하는 것이 불교다. 미국에서 자유, 자유를 외치지만 기분 나쁘면 총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탕' 쏠 수 있는 자유들이 난무한다. 여기 포크가 있다. 이 포크는 나의 생각 방향에 따라 음식을 집어먹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사람을 찌를 수 있는 무기도 된다. 

불교가 말하는 자유는 에고(ego)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남을 위한 자유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결혼한다고 해서 '참선'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나.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오로지 '나'를 생각하게 된다." ―지난해 유럽 가톨릭 교회들이 사제들의 '섹스 스캔들'로 비난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신부나 수행자들의 결혼을 금하는 것이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나왔다. "나는 수도승이다. 그것이 나의 답이다." 나는 외로워지고 싶었다 외국인 승려 현각은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일익을 담당한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을 법정 스님이 '깨달음의 거울'이라는 책으로 우리말로 풀이한 것을, 2006년 영문으로 번역, '미러 오브 젠(The Mirror of Zen)'이라는 책으로 미국과 유럽에 선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서산대사가 후학을 올바른 수행의 길로 이끌기 위해 50여 종의 경론과 조사의 어록에서 요긴한 대목을 간추려 설명한 책으로 공부 방법과 화두, 수행의 경로 등을 밝힌 선의 명저다. ― 

법정 스님과는 어떻게 알게 됐나. "2004년 봄, 스님이 나를 길상사로 부르셨다. '깨달음의 거울'이란 책을 주시며 영문으로 번역해달라 부탁하셨다. 고사했다. 난 학자도 아니고, 한자도 모르는 수행승이지 않나. 그런데 스님이 '네가 공부 열심히 한다는 소리 들었다, 번역할 자격이 있다' 하시더라. 서산대사가 조선시대에 쓴 책을 서양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보수적인 직역보단 의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가 필요 없는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다." ―법정 스님은 어떤 분으로 기억하나. "모범 수자.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반듯한 수행자." ―'오두막에 살면서 수행정진 하고 싶다'고 하자 법정 스님이 '자네는 살 수 없다'고 하셨다던데. "나처럼 키 크고, 코 크고, 얼굴 허연 승려가 와 있으면 이 마을 저 마을로 소문이 나니 조용히 살기 힘들 거란 뜻이었다." ―오두막에 살고 싶으셨나. "물론이다. 잠시 산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그런데 등산객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보더라.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숭산 스님은 영웅이자 원수 ―

하버드의 엘리트를 한국의 절간으로 불러들인 숭산 스님은 어떤 분이었나. "가끔은 아버지였고, 가끔은 어머니였다. 코치이자 트레이너였고, 영웅이자 원수였다." ―원수라고 했나?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런 식의 감동이 없는 사람, 드라마가 없는 사람은 스승이 아니다." ―많이 혼나셨다 보다. "책(만행) 냈을 때. 나이도 어리고 수행 경험도 짧은 제자가 자기를 빨리 과시하려는 욕심으로 보이셨을 테니. 표지에 얼굴도 나오지 않았겠나. 하지만 내겐 스승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 ―무엇인가. "그때만 해도 숭산의 사상은 한국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제자들로서는 이를 집대성할 사명이 있어서 이런저런 출판사로 타진하고 있었는데, IMF 외환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모두 거절당했다. 그때 한 출판사가 내 출가기를 써주면 스승의 책도 함께 출판해주겠다고 했다. 솔깃했다. 고민 끝에 계약했고 6주일 만에 원고를 썼다. 탈고한 뒤 100일간 안거에 들어갔는데 마치고 나와 보니 난리가 났더라. 그 책 때문에 숭산 스님도 세상에 더 크게 알려졌다." ― 

오로지 스승의 책 때문에 '만행'을 출간했나? "나는 한국인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전통과 철학이 있는지 일깨워주고 싶었다. 1990년대 초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자기의 좋은 전통을 버리고 미국 사람들 사는 대로, 입고 먹는 대로 쫓아가는 한국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양 세계는 동양의 정신과 철학을 배우려고 안달인데.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불교 서적을 읽는 것은 피어싱과 함께 젊은 세대들의 최신 트렌드였다. 당신이 구식이라고 버린 이 스카프를 다른 사람들이 주워 '정말 멋지고 아름답다'고 열광하면, 버린 스카프를 다시 갖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나? 내 책이 그런 역할 해주기를 바랐다." ― 

그런데 요즘 '만행' 책을 구할 수가 없더라. "절판시켰다. 책 때문에 겪은 고통이 컸다. 일반인, 심지어 도반들로부터도 돈 많이 벌었겠다는 질문이 나오더라. 책을 내니 '아침마당'에도 나가야 하고, 라디오도 나가야 하고 특강도 해야 하고. 연예인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수행자로 살고 싶었다." ―'만행'이 수십만부 팔렸다. 인세는 어디에 쓰셨나. "책의 마지막 장에 쓴 대로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위한 숭산 스님의 큰 뜻을 이루는 데 기부했다." ― 

숭산 스님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은 무엇인가.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산은 항상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왔다 가는 길이 아니요, 있었다 사라지는 길이 아니다. 자연 그대로일 뿐." 제일 좋아하는 불경은 '순간경' ―독일선방 얘기를 들려달라. 왜 뮌헨에 정착하셨나. "유럽을 만행하면서 수행 정진할 자리를 찾던 차에 독일 불자들을 만났다. 수행 정진을 도와달라고 하여 뮌헨에 머무르게 됐다." ―한국 사찰의 모습은 아닐 텐데. "작은 주택을 빌려 선방을 꾸몄다. 일반 수행자가 40명 정도. 절반은 한국 교포들이다." ― 

선방 이름이 '불이선원'이다. "불이(不二)는 불교의 기본 사상이다. 당신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 인간의 본성은 하나라는 얘기다. 침, 오줌, 비, 눈, 눈물…. 모양과 색깔, 냄새는 다르지만 모두 H₂O다. 둘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둘을 만들어서 너는 틀리고 내가 옳다고 싸우는 거다. 한국의 젊은 개신교 신도들이 주도한 '봉은사 땅 밟기 사건'은 거기서 비롯됐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자살•폭탄테러도 마찬가지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독일과 여전히 둘로 나뉜 한국은 그래서 내게 각별하다. 분단이 지속될수록 배타성, 이질감만 커진다. 불교가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독일이 심심하진 않나. 한국처럼 다이내믹한 사회에서 살다 가셨으니. "거제도에서 기암절벽을 구경하는데 배 안에 '뽕짝'이 쿵작쿵작 울려 퍼지더라. 선장에게 소리 좀 줄여달라 부탁했더니 뽕짝을 안 틀면 승객들이 심심해한다고 했다. 한국이 내게 준 가르침 중 하나가 센세이션과 자극이다.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고요와 평화, 여백을 즐길 줄 모른다. 카페에 가보라. 연인이 나란히 앉아 스마트폰만 열심히 문질러대고 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리며 108배를 하는데 주머니에선 휴대폰이 쩌렁쩌렁 울려댄다. 걱정스럽다." ―한국에서 수행하던 때보다 힘든 일 많으실 것 같다. "도반들, 한국 스님들이 많이 도와주시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건 사실이다. 식당 접시닦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 

 

왜 제사을 지내야 하는지?

우리가 제사지낼때 사대까지 지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이유가 무엇입니까? 쿨하게☆ | 2005-05-19 11:17 | 조회 87 | 답변 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http://k.daum.net/qna/view.html?qid=0BBnF 

 왜 4대까지 제사를 지낼까 우리는 전통적인 관례로 4대조 이하 조상님들께 제사를 올린다. 왜 하필 5대조나 6대조가 아닌 4대조 이하일까? > 거기엔 이유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기(氣)의 파장이 약 100년 동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氣)의 파장이 변하지 않으므로 자기와 파장이 같은 후손과 함께 할 수가 있다. 1대를 25년으로 하면 4대조는 100년이 된다. 돌아가신 분은 100년 동안의 바로 자기의 가족이나 후손과 함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4대조 이하의 조상영들은 후손과 파장이 맞으므로 후손과 함께 할 수 있고 후손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영향력도 음과 양으로 좋은 쪽과 나쁜 쪽 양갈래이다. 그것은 모두 그들 조상영의 생전의 사람됨과 인격 그리고 업보에 따라 나타난다. 살아 생전에 착하고 어질게 살아 높은 영계에 가 계신 조상영은 후손을 위해 여러가지 도움을 주고 보살펴 주려고 애쓰지만, 생전에 인간됨이 천박하거나 악독했던 사람, 혹은 어려서 세상물정 모르고 죽은 소위 철부지 귀신들은 후손을 못살게 굴고 온갖 나쁜 짓을 서슴치 않는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조상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후손의 몸을 빌지 않으면 안 된다. 조상은 영(靈)으로 존재하고, 영은 곧 기(氣)이므로 물질인 육체가 없이 기만으로는 아무것도 행할수가 없다. 

즉 천지조화가 불가능한 것이다. 파장이 맞는 고로 4대조 이하 조상영은 그 후손의 몸에 임할 수 있다. 조상의 영혼이 후손의 몸속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가 텔레비젼의 채널을 맞추어서 어떤 특정 방송국의 방송을 수신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2005-05-19 21:16 | 출처 : 본인작성 , [카페] ─┼★불가사의에 답이있다★┼─ http://k.daum.net/qna/view.html?qid=0BBnF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조상과제사 게시판영공부방 2010/09/24 22:03 http://kbg7715.blog.me/20114080017 

 조상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어떻한 영향을 끼칠까? 왜 조상을 섬겨야 하는걸까? 조상은 나이며 나는 곧 조상이다. 삼생을 걸쳐 윤회를 하며 못다한 이승에 공부를 하는것이 우리내 삶이다. 그와 더불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 때어나 살아가기엔 너무 삭막한 이곳에서 기댈곳이란 부모밖에 없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 뗄레야 뗄수없는 인과의 고리의 끝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 바퀴처럼 그렇게 이어 지는것............ 

 조상과 자신이다. 뿌리없는 나무없고 가지없는 뿌리 없듯이.............. 제사는 왜 지내야 하는가. 인다리의 의해서 조상과 자손의 인연은 고조 까지이다. 고조를 벋어나면 사실상 이승에서의 연은 끝낫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고조를 벗어난 조상도 조상 이기는 하나 벗어난 조상이다. 인연은 있어으데 자유로운것. 그레서 우리내는 고조 까지만 제사로 모시는 것이다. 제사를 모시는 이유는 자손의 도리 이기도 하지만 조상과 자손의 감흥을 하기위한 수단 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이미 돌아가신 조상이 무슨 힘이 있어 자손을 돌보 겠냐고.......

 몰라도 너무나 모른 소리다. 예를 들어보자. 갑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날 여행을 하다가 버스를 탓는데 깜밖 잠이들었단다. 그런데 꿈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 나더니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빨리 버스에서 내리라고 하시 더란다. 그분은 깜짝놀라 꿈에서 깨어나 하도 꾼이 생생해 아버지가 시키는 데로 버스에서 내렸단다. 그것도 인적도 두문 산길에서............ 그렇게 막상 내리긴 했지만 막막 하드란다. 차도 잘 다니지 않는 길에 덩그라니 자기 혼자내렸으니 어찌 아니 그러 하겠는가. 그렇게 터덜 거리며 꼬박 먼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앞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며 산길로 버스가 딩굴러 있는게 보이 드란다. 조금전 자신이 탔던 버스가..............(거의사망) 만약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지 않았드라면 자신도 불귀에 객이 됫을걸 생각하니 아버지가 너무너무 감사하고 눈물이 절로 흘러 내리며 죽어서도 자식을 살리는 부모의 사랑에 몸둘바를 몰라했단다. 

 조상이란 그런 것이다. 이미 죽었다 하여 모든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자손을 사랑하는 마음은 생시나 다름없이 변함이 없는 것이다. 위와같은 사례는 많다. 변함없이 자손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 죽어서도 자손이 잘되기를 바래 꿈속이지만 자신의 자손을 위해 월력이 없어 위험한데도 자신의 몸을 던져 자손을 구하는 마음........... 헌데 요즘 우리는 어떠한가? 내 민족에 종교도 아닌 타종교를 믿으며 조상은 이미 남이되어 버렸다. 이아니 슬픈 일인가. 옛말에 잘되면 자신이 잘해서 이루어 진것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란 우리내 속담이 있듯이 조상과 자손은 하나다. 

 조상을 잘모신집은 잘먹고 잘산다. 또한가지 조상은 장손만 모시라는 법은없다. 다 똑같은 자손이기에 그 누가 지내도 무방하다. 다만 정확한 절차를 밟는다면 말이다. 필히 너도나도 조상을 밧드러 행복한 가정이 되고 조상에 가호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조상중에 업보가 많은분이 계시면 그또한 자손이 닦아줘야 한다. 그래야 집안이 편하고 자손들중 풍파를 겪는 자손이 나오지를 않는다. 조상은 내일에 나라고 생각하라. 나또한 죽으면 조상이 될지니..................... 먼 태고적 부터 내려온 우리내 제사............ 점차 사라져 가는것이 너무 안타깝고 지낸다 하여도 형식적인것에 슬프다. 복되게 살고자 하면 조상을 잘 모셔라. 없으면 없는데로 깨끗하게 마음을 담아서 지낸다면 조상님들도 그 마음을 알아 잘 받을실거다. 

 제사를 지내다가 이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냥 이사를 하면 절대 조상이 따라 가지를 못한다. 분명한 절차가 있으니 절차에 따라 모시고 가야한다. 제사는 동시에 각각 지내서도 아니된다. 형제가 서로 지내겠다고 각각 지내면 저승에 게신 조상이 편치를 못해 아니 지낸만 못하다. 부득히 제사를 지내지 못했을 경우 매 해년마다 돌아오는 백중일이 있다 .(음 7월 15일) 이날에 조상님들에 제사를 지내 드리면 그나마 위한이 되고 조상이 받아 잡수시니 참고 하기 바란다. 내가 미래에 조상임을 잊지말라.......................... [출처] 조상과제사|작성자 천지목 .

종교와 제사갈등 - 예1

종교문제로 제사 참석 안한 며느리에 "이혼하고 자녀 양육비 보내라" 판결 • 

정지섭 기자 xanadu@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11.01.22 03:01 "

제사 때 절 안해도 되니 어른들께 인사라도 하자" 시부모 설득에도 거부 "남편도 파경에 책임 있어 위자료는 받을 수 없다"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집안의 제사 참석을 거부하는 등 종교 문제로 시집과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킨 며느리가 남편으로부터 이혼•자녀 양육권 소송을 당해 패소했다. 집안 종교 갈등이 봉합이 어려울 정도로 심화됐다면 갈라서는 게 해결책이라고 법원이 판단한 것이다.

 서울가정법원 가사1부(재판장 안영길)는 이모(28)씨가 부인 윤모(28)씨를 상대로 낸 이혼소송에서 "두 사람은 이혼하고 윤씨는 이씨에게 딸이 성년이 될 때까지 매달 30만원의 양육비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고 21일 밝혔다.. 

두 사람은 대학 재학 중 연애결혼해 다섯 살짜리 딸을 두고 있다. 남편 이씨의 집이 유교적 전통이 강한 불교 집안인 반면, 윤씨는 교회목사의 딸이다. 두 사람은 결혼에는 성공했지만, 부인이 이른 나이부터 시집살이를 한 데다 종교 갈등까지 겹쳐 다투는 일이 적지 않았다. 쌓인 갈등이 폭발한 것은 일요일과 겹쳤던 2007년 설날이었다. 윤씨는 시부모가 "차례 지내러 큰집에 가자"고 말하자 "교회 가야 한다"며 거부했다. 시부모가 "절은 안 해도 되니 어른들께 인사나 드리고 오자. 교회는 오후에 가도 되지 않느냐"며 재차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윤씨는 "앞으로 제사에 절대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부했다. 

이에 시부모들이 "그러려면 집을 나가라"고 화를 냈고, 윤씨는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이들 부부는 두 달여 만에 다시 만났는데, 이씨가 시부모에 대한 행동을 문제 삼으며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내자 윤씨는 아이를 남편에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양가 부모들이 회의까지 가졌지만 종교문제에서 입장 차를 좁히지 못했다. 윤씨는 아이도 찾아가겠다며 시댁에 왔다가 남편과 시부모의 반대로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이씨는 별거 뒤 다른 여성과 만나면서 2009년 부인을 상대로 이혼 및 양육권 소송을 냈다.

 부인 윤씨는 재판에서 "분가해서라도 남편과 살고 싶다"는 뜻을 보였지만, 재판부는 남편 이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종교 문제로 부부가 다투고 재결합을 논의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혼인관계는 파탄에 이른 것으로 봐야 한다"며 "파탄에 이른 경위와 현재 상황 등을 보면 아이는 남편 쪽에서 기르는 게 옳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남편 이씨가 위자료 3000만원까지 청구한 것에 대해선 "종교 문제로 힘들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결혼한 책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교에 의한 제사 갈등 이렇게 해결 하고 있다.

Friday, January 21, 2011 종교로 인한 제사 갈등 이렇게 해결 하고있다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종교로 인한 제사 갈등. 이렇게 해결하고 있다 글쓴이: 김두성 9.01.21 20:39 http://cafe.daum.net/sightzone/I4KI/154 

 종교로 인한 제사 갈등. 이렇게 해결하고 있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기쁨과 갈등이 공존하지요. 가족을 만나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견해차가 존재하여 갈등도 일어납니다. 저는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종교적 신념에 의한 '제사갈등' 이라 봅니다. 하여 오늘은 이 얘기 좀 해볼까 하는 데요.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저희 집 얘기를 좀 하면서 풀어가보고자 합니다.
 ♦ 갈등의 해결 열쇠 저희 집은 3년전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지금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특히, 제 아내는 장로에서 목회자가 되신 장인 어른 밑에서 자란 이른바 '모태신앙' 의 소유자입니다. 반면 저희 집안 대부분 구성원은 모두 종교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분들은 상당히 고지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할아버님 제사 문제가 붉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갈등이 상당했겠지요. 고지식파와 신학전공자, 권사님까지 있는 곳이니 말이죠. 하지만 저희는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지금까지 넘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해"와 "유연성"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 내 부모를 기리는 게 왜 우상숭배인가? 저는 진보적인 학풍으로 유명한 H대학교를 다녔습니다. 저희 학교는 '학문과 경건' 이라는 구호아래 <진리, 자유, 사랑>을 전하며 사회참여를 매우 강조하고, 상당히 열린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어린 시절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저는 이 곳에서 종교 상호간의 열린 자세에 대한 것을 배웠습니다. 이 때 느낀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칫 종교가 그 열린 자세를 잃을 경우 강력한 칼날이 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상호이해가 -특히, 기독교인-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상숭배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우상이란 단순히 타종교나 조형물이 아닌 내 자신에 스며든 교만과 배타성입니다. 또한 정신을 못차리게 하는 물질과 풍요의 맹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가리는 이념 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서너 줄로 압축했습니다만 이에 대한 좋은 책이 있습니다. 제 스승님이신 김경재 교수님의 이름 없는 하나님 을 정독해보시기 바랍니다. 즉,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가 우상숭배와 등치 되지 않음을 알았고, 집안 내에서라도 함부로 내세워지는 배타적인 자세는 오히려 예수의 이름을 욕보이는 무서운 성격을 지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카톨릭은 지나 62년부터 제사는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동양의 미풍양속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현재는 제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더 논리적 접근을 해봐도 그렇습니다. 내 부모는 사람이었지요. 기독교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보고, 죽은 후에도 하나님 품에 안긴다 여깁니다. 그렇다면 내 부모 역시 하나님의 큰 자비 아래 있는 것이 되지요. 그런데 만약 내 부모가 우상이라면 이는 하나님과 비교될 수 있는 동격을 취한 다는 것일테고, 이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기독신앙과는 배치되는 것이므로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에서 또 하나의 신이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 반드시 특정형식 고집보다 그 핵심정신을 지키는 유연함이 필요 집안일의 주축이 되시는 작은 아버님의 입장은 이랬습니다. 먼저, 저와 아내, 할머님의 신앙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저희가 굳이 유교양식을 따를 필요가 없음을 이해해주셨고, 그 양식 역시 기독교의 추도예배라 한들 상관 없다는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차피 제사라는 것의 의미 자체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제사는 오래 전 무속신앙 시절부터 있었지만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역시 유교 이념이 이 땅에 자리 잡은 이 후 입니다. 물고기 머리와 과일 색을 맞추는 것 같은 세세한 항목 역시 유교의 우주론에 입각해 설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왜 유교에서 이렇게 제사를 강조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효"의 가치를 통해 나라의 근간인 가정을 바로 세움에 그 첫째 목적이 있었습니다. 가정이 서야 나라가 선다는 유교 이념에 따른 것입니다. 두번째로 부모를 잊지 않음이 사람이 가야할 길 중 하나임을 확인함이 있고, 세번째로 전쟁, 기아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다시 하나로 모이게 하며,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려던 다양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 어른들은 바로 이것을 기억해 주셨던 것이지요. 따라서 제사의 양식이 기독교의 예배이든 아니든 먼저 가족이 모이고, 부모를 기린다는 핵심 정신을 지킴이 중요하다 여겼던 겁니다. 


 자, 이렇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제사 본래의 의미를 기억하니 일정부분 절충할 수 있는 부분이 보이더군요. 자연스레 이 문제로 인한 갈등도 사라질 수 있었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내 부모를 기리는 문제 때문에 가족끼리 다투고, 내가 믿는 예수 이름이 욕보이게 되면 이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요. 그렇지 않나요? 어떻게 조절하며 풀어나갈 것인가? (필자의 사례) 그럼 여기서 저희 집은 어떻게 명절 제사를 지내는 지 적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범은 아니고, 각 집안마다 차이가 있으니 참고만 하시면 좋겠습니다. 

1 )먼저, 기독신앙이 없는 다른 분들의 마음은 음식을 꼭 차려야 한다 여기십니다. 예, 그러시라고 합니다. 이 음식이 결국 명절 음식이 됩니다. 혹여 이 음식도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라 여기는 분은 기도를 통해 거룩하여 진다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2)상을 차리면 제가 주도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제가 설교도 합니다. (일반 크리스챤 가정은 교회요람에 나와 있는 양식을 따르면 됩니다)

 3)설교가 끝나면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싶어 하는 분이 나와 진행합니다. 

4 )끝으로 마무리 기도를 하고, 모든 순서를 마친 후 함께 식사를 하지요. 식사를 하며 화목하고, 재미있게 교제를 나누면 됩니다. 이번 설은 경제도 어렵고, 사회도 뒤숭숭 하여 별로 흥이 나지 않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가족간의 화합과 격려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명절은 서로 싸우려 모인 것이 아니지요. 이걸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충할 수 있는 부분은 절충하고,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큼은 받아주는 게 가족이겠지요. 아마 돌아가신 어른들이나 하나님도 이런 화목한 모습을 더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 조상을 숭배 하여야 하는가

사후는 어떠한 상태로 있는 것일까? 불교믿는 사람에게서 상식화 되어 있듯이 생전에 자기가 지은바에 따른 마음상태를 자기고 계속 차원을 달리하는 현실공간에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착하고 조화된 상태의 분이라면 평화와 기쁨이 그에게 차있는 것이다. 

마음이 거칠고 남을 미워조상숭배의 공덕 | 불교 박유승(박노동)조회 15|추천 0|2010.08.04. 17:03 조상숭배의 공덕 1977년 09월 통권 35호 김현진(광명의 집 본부회장) ㅁ 

1. 조상공경은 하여야 하는가 조상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하물며 거기에 다시 무슨 공덕을 논할 여지가 있을까. 오늘날 조상공경을 논하고 그 공덕을 말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 당연지사에 이상(異常)이 있기 때문이다. 생존하고 계시는 부모님에게 마저 효도할 이유를 논하게끔 되었다.

 그러니 이미 돌아가신 조상님 앞에 공경심을 갖는다던가 공경행을 한다는 것이 문제될 만도 한 것이다. 문제삼아야 할 이유는 또 있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가지가지 불행들, 정신적 갈등, 신체상의 병, 가정의 불화, 환경을 둘러싼 바람직하지 않은 사고들....... 이것들이 알고 보면 조상공경과 사뭇 관계가 없지 않은 것이다. 

분명 조상공경은 충분히 논할 가치가 있다. 조상공경의 공덕이 어떤 것인가를 지식많고 똑똑하고 자존심 많은 현대인에게는 분명히 알려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 유식한 분들이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너무나 무식한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조상공경의 참뜻에 등한한 것이다. 

2.조상의 사후상태 문제는 사람의 사후가 있느냐가 문제이고 보다 근원적으로는 인간생명이 어떤 것이며 나를 형성하고 있는 나의 둘레가 어떠한 것이냐에 귀착된다고 본다. 조상의 하고 다투는 불평스러운 마음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고통이 그의 사후생애에 따라 다닌다. 

고통스러운 사후가 되든 즐겁고 평화스러운 사후가 되든 온전히 본인의 생각과 활동에 따라서 스스로 자기 마음 속에 지어 쌓은 마음공덕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조상들이 생전에 살아가는 동안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의 마음이 닦아지지 않고 그의 마음이 착하고 활기넘치며 밝아야 할 자기공덕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 거기에는 물체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가지가지 고통이 그를 따른다. 

인간이 죽으면 그만이라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그와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 그러나 육체는 사람이 아니며 죽은 것은 착각된 의식이며 사람의 생명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물질이 아니며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육체적 죽음이나 물질적인 조건변화로 인해서 죽을 수 없다. 생명은 스스로 이것이 물질을 초월하는 초월성을 지니고 있다. 

물질 밖에 볼 수 없고 육체적 감각권안에 일밖에 모르는 눈에서는 인간 생존의 지상생활이 다 인듯 하지만 실로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점은 이미 본지에서 다른 필자에 의해서 영계문제가 여러 차례 다루어진 것을 안다. 그 모두는 진실인 것이다. 믿지 않아도 현실적인 진실인 것이다.

 밝지 못하고 맑지 않고 조화되지 않은 마음상태를 지닌 영혼들은 수많은 고통에 시달리게 되어 지상에서와 같이 죽어서라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죽을 수 없고 몇 백번이고 죽어가면서도 죽지 못하고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저들은 고통의 호소를 가까운 육친들에게 해온다.

 고통받는 영혼의 이와같은 호소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정신적 불안이나 신체적 병증세를 가져오는 것이다. 인생은 살아가는 동안에 자신의 수행부족으로나 가족을 위해서 또는 환경이 부득이 해서 본의 아닌 짓을 할 수 있는 것이며 행동까지는 하지 않았어도 마음 속에서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대로 사후생활에 연결된다. 

 오늘날 지상에 남겨놓은 자손이나 자손을 위한 가지가지 노력이나 자손과 사회를 위하여 이룩해 놓은 가지가지 사업과 시설의 뒷면에는 그일을 감당했던 사람들의 영혼이 긴 한숨과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3. 조상미혹과 자손의 병관계 고통받는 조상이 자손에게 호소하는 결과는 나쁜 염파가 되어 그 자손에 불행을 가져온다 하였다. 실제 아무리 분명한 합리적 사유에 의해서 발생되고 진행된 가지가지 배후에는 나쁜 염파의 작용이 분명히 있다. 척추카리에스, 정신병, 노이로제, 각부신경통, 심장병, 눈병, 지체불구 등등 여러 병들이 조상의 망령과 관계가 많은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부인은 척추카리에스, 안면신경통에 심한 변비가 겸하여 참으로 암담한 생활에 젖어 있었다. 그가 뚝뚝한 사람이어서 조상의 영을 무시하고 제고집만 부렸던 사람인데 이런 병이 들이닥쳐 죽을 문에 이르자 마음을 돌렸다. 조상님 안 모신 것을 뉘우치고 일심으로 조상께 감사하며 조상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염불독경을 쉬지 않았다. 

마음이 이렇게 바뀌고 열심으로 염불독경하고 감사공경한 한달만에 그 완고한 병들이 기적적으로 물러난 것을 나는 안다. 의사는 병을 안다. 원인도 안다. 그러나 원인의 원인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치료해도 제대로 치유가 되지 않는다. 한 남자가 상처했다. 젊은 사람이어서 곧 재혼하였는데 그때부터 그는 중증의 노이로제 환자가 되었다. 다행히 불교 믿는 사람이어서 법사님 지도를 받아 조상공경하고 열심히 독경하고는 씻은듯이 나았다. 사람들은 영혼을 부인하기 쉽고 신경증적 병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알고보면 분명히 원인도 있고 치료법도 있는 것이다 . 

4.조상공경의 공덕원리 살아서는 부모이지만 돌아가시면 변할까? 그렇지 않다. 살아서도 한 몸을 이룬 부모와 자손이 동일체성 관계에 있으며 죽은 후도 변함없다. 돌아가신 부모의 부모, 또는 그 이상의 조상과도 역시 같은 관계에 있다. 슬퍼하고 기뻐하고 하는 마음상태는 서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운명은 1/3은 본인의 전생부터의 업보이고 1/3은 본인의 사고와 활동이라 하며 나머지는 조상들과의 깊은 관계에서 형성된다는 말까지 있는 것이다. 

 조상을 공경하며 우선 조상의 마음의 편안을 보태고 그 앞길을 밝혀줄 수 있으며 자손에 대한 반발이나 호소를 가호력으로 바꿀 수 있다. 특히 불교에 의한 독경, 염불, 천도법식은 영혼의 마음을 위로하고 자손과의 관계를 조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조상의 영혼을 깨우쳐주고 그의 마음을 밝혀주며 성인의 가호력을 입게 한다

. 망령의 마음이 평화해지고 밝아질 때 망령이 즐거울 뿐만 아니라 망령이 가진 악한 염파로 인해서 발생된 그의 가족, 친지들의 불화나 병고가 사라진다. 뿐만 아니라 밝은 조상의 염파는 그 자손에게 행운과 기쁨을 주는 것이다 .

둘째로 현세에서 부모와 대립했을 때 생기는 정신적 갈등이나 압력이 현실적 고통을 주는 거와 같이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대립관념이나 무시하는 생각들은 당자의 마음에 부조화를 이룬다. 마음 안에 있어서의 대립감정은 그것이 살아 있는 부모이거나 죽은 조상이건 간에 다를 바가 없다. 나무를 보존하는 방법이 뿌리를 잘 다스리고 관리하듯이 살아 있는 모든 가족의 평화도 조상과 함께 깊은 연관이 있으며 조상은 바로 가족의 뿌리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세째로 혹자는 말하리라. 사람은 금생 뿐만이 아닌 내생이 있다 하더라도 그 내생은 바뀌고 윤회한다 하는데 만약 조상이 윤회를 받아 다른 곳으로 몸을 받아 놨을때 조상공경의 실리가 있느냐 할지 모른다. 원래 우리의 눈이나 생각으로는 이생과 저생이 있다. 그러나 진리의 실상에서는 언제나 현재뿐인 것이며 멀고 가까운 것도 처소의 차이도 없는 것이고 오직 영원한 일념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작고한지 오래된 조상을 공경하였더라도 공경한 그 공덕은 바로 미치는 것이며 인간에나 다른 악도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공덕이 거기에 미치는 것이다. 

그리고 자손의 조상공경하는 마음은 그 마음 속의 조화와 평화와 착한 마음이 넘치게 되어 더욱 밝은 행운이 그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잘되면 제 덕이고 안되면 조상탓이라는 말이 있지만 조상탓을 조상공덕으로 바꾸는 방법은 바로 효성스런 조상공경의 행위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조상공경은 필경 이땅의 평화건설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지만 이에 대하여는 지면상 생략할 수 밖에 없다.

율산 브로그을 개설 하면서

율산(栗山) 브로그 을 개설 하면서

내 청소년기를 복숭아 과수원 과 밤나무 산에서 피땀을 흘려가면서 보냈다. 어찌 꿈엔들 잊으리오. 그래서 밤나무산 을 율산 브로그 라고 하고 복숭아 과수원 을 도원 블로그 라고 명명 하여 여러 동기간와 소통 하고 싶어서 우선 율산 브로그을 개설고저 한다.

내나이 30이 되여서 60년대 중반에 미국에 건너와서 공부 끝나고 미국에서 산 세월이 고국에서 산 세월 보다 더 많다. 그동안 거의 반세기동안 고국도 많이 변화가 있었는데 아직도 내 사고는 60년대 중반에 갖이고온 한국식 윤리적 사고 그대로 라고 친지들이 나에게 말하곤 한다.

나 어렸을 때 밥상머리에서 매일 아침 아버지로 부터 효도 학을 귀가 달도록 들었고 중학교 2 학년 겨을 방학 때는 소학(小學) 와 대학(大學)을 익혔다. 너무 오래되어서 머리에 남는 것은 몇 구절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래도 아버지 덕분에 소학과 대학을 익혔으니 다행이고 이것이 나의 인성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하였고 여기에 천당을 가기위 하여 지선을 하란 말은 없다. 보편적 윤리 와 도덕 만 있을 뿐이다. 특히 중용지도 (中庸之道) 로 가야된다고 생각 될 때 나의 중심은 좀 더 과학적 근거를 기준으로 객관적 입장으로 바라보고 저 하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또 하나는 인본주의(Humanism)에 관한 문제이다. 나는 직장에 있을때 항상 소외된 약자의 편에서서 동정 하고 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내상부 경영자 로부터 불이익을 당해도 이를 감수 했다. 정치적으로도 마찬가지로 소외되고 약자의 편이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항상 소외된 약자의 편에서 계셨든 분이시고 약자를 위하여 생을 바치신 분으로 내가 제일 존중 해온 지도자이시다.

현각스님 깨서 전하는바 ([조선일보] 2010년 12월 11일(토) 오전 03:02) 는 “ 종교는 신앙이 아니라 윤리로 가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우리는 종교를 버려야 한다. 평화 대신 전쟁, 갈등과 환경만 파괴하는 종교는 이제 버려야 한다. 2010년이 되었는데 인간이 여전히 종교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석가모니는 불자가 아니었다. 예수도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종교를 만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개신교의 가르침은 많은 부분 예수 이후에 생긴 것들이다. 종교가 종교다워지려면 보편적 윤리, 사랑하고 베푸는 마음을 실천해야 한다."

―신앙이 아니라 윤리로 가야 한다는 말은, 예수나 부처에 대한 신격화 혹은 숭배를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형태일 뿐이다. 종교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생활에서 실천해 나갈 때 참종교가 된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말씀은 '나의 말을 믿지 마라, 내가 말했기 때문에 믿으면 안 된다'였다. 맹목적인 믿음은 종교의 독이다."

다 이게 대단히 감명 깊게 내뇌리에 반짝 달라붙는 명언들이다. 보편적 윤리, 사랑하고 베푸는 마음을 실천해야 하는 종교가 되여야 된다는 것 너무나 당연 하지 않는가?

이혁구
2011년 1월 24일
San Jose, CA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