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13, 2014

프란치스코 교황 “진화론·빅뱅이론 모두 맞다” 파격 발언


프란치스코 교황 “진화론·빅뱅이론 모두 맞다” 파격 발언

입력 2014-10-29 13:56:00 수정 2014-10-29 13:57:36
TextBanner

프란치스코 교황이 진화론과 빅뱅이론이 가톨릭의 가르침과 상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교황이 28(현지시간) 바티칸에서 열린 교황청 과학원 회의에서 생명이 진화의 과정을 통해 발달했다는 생각이 가톨릭의 가르침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DPA통신 등 외신이 전했다.

교황은 "창세기를 읽다보면 하느님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지팡이를 지닌 마법사인 것처럼 여길 위험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이 각자에 주신 규칙에 따라 성장해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오늘날 우리가 세상의 기원으로 여기는 빅뱅이론도 신성한 창조자로서 하느님의 개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진화는 원천적으로 진화할 존재의 창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가톨릭교회는 과거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를 탄압한 후 자리 잡아온 반() 과학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가톨릭교회는 이미 갈릴레오를 복권시켰으며 진화론을 과학적 이론으로 인정하고 있다.

banner

'하느님이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세기 내용도 하느님의 창조 활동을 비유한 이야기로 간주할 뿐 창조론을 과학이론으로 교육하지도 않는다.

[
아시아경제]

 

Monday, September 29, 2014

프란치스코 교황 소식

 

프란치스코 교황 소식

  

  

  

......................................................................................................................................
 

 사진은 전 교황과 비교하기 위해 나란히 올려놓은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 교황과 모습도 다르지만, 하는 행동도 매우 다릅니다.

중요한 차이 몇 가지만 간추려보겠습니다.

 

1. 황금의자를 나무의자로 교체함

 

2. 황금스카프를 사양함

 

3. 전통의 붉은 구두 대신, 자신의 검은 구두를 그대로 신음.

 

4. 루비, 다이아 십자가가 아닌, 철 십자가를 사용함. 

 

5. 교황반지를 금이 아닌 은으로 바꿈.

  

6. 겉옷 안에는 일반 신부복을 항상 착용함. (일반 신부와 다르지 않음을 상기시킴) 

 

7. 레드카펫을 없앰. - 인기, 박수갈채에 관심없음.

 

  

 

  

  

독일의 한 대주교가 약 4.2천만 달라(3.1천만유로)를 들여 집을 새로 지었는데 

욕조만 2만달러, 탁자가 3만달러였다는 것. 교황님이 이 소식 듣자마자

곧 대주교를 해임하고  

그 맨션을 불우이웃과 홈리스를 돕기 위한 시설로 바꿔버림.  

  


 

교황님의 얼굴이 궁금한 꼬마,  

 



연설하러 의자에서 일어나는 교황,  
옆에 있던 주교와 관계자들이 아이를 데리고 가려하자,

 
  



그냥 놔두라고 만류. 
사진으로도 알 수 있듯이, 무대 앞에 여러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결국 아이를 의자에 앉혀 놓고 연설하는 교황.
앉아있는 아이는 처진나만해 보이지요?

 

교황의 소탈함은 이밖에도 많습니다.

무슬림에게 세족 후 발에 키스하는가 하면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본인 차는 직접 운전한다는 것.
시계도 롤렉스 같은 고가의 것이아니라, 5만원 짜리를 차며,
 옷도 비단 아닌 일반 면직물로 해 입어
추기경들도 교황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
 
등등.

 

그 분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신앙을 강요하지 않고
비신도라도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하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교황은 비 종교인에게도 참다운 성인으로 여겨집니다.  

종교인은 물론, 일반인들도 모두 그 분을  존경하고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옮겨 옴)


 


 

  


 

 

Thursday, May 22, 2014

임금의 묘호(廟號) -조(祖)'와 '종(宗)'의 구분 기준


조선시대(朝鮮時代역대 임금의 묘호(廟號)
       '()' '()'의 구분 기준과 그 배경
 
  본디 임금이 승하(昇遐)하면, 창업을 한 왕에게는 묘호(廟號)로서 '∼조()', 수성을 한 왕에게는 '∼종()' () 붙여 승하한 임금의 위패(位牌)를 종묘(宗廟)에 봉안(奉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공()이 있는 왕에겐 '∼조()'를 붙이고 덕()이 있는 왕에겐 '∼종()'을 붙인다 하였는데, 이를 이른바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語源)은 한()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 사마천(司馬遷)이 지은《사기(史記)-효문본기(孝文本紀)》에서 문제(文帝) 임금(B.C.203-157)에 의하여 "임금 중에서 공적이 있는 자는 '祖'라고 하고, 덕망이 있는 자는 '宗'을 붙여 사용한다(祖功宗德)"고 한 것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조선왕조(朝鮮王朝) 또한 태조(太祖) 원년(元年)이성계(李成桂)의 사대조(四代祖) 존호(尊號)를 종묘(宗廟)에 봉안(奉安)할 때, 묘호(廟號)를 정하는 원칙을 세웠으니,《태조실록(太祖實錄)》원년(元年) 116일자(日字)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재(登載)되어 있습니다.

  "()이 있는 이는 조()로 하고, ()이 있는 이는 종()으로 하니, ()는 부모(父母)를 높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시호(諡號)로써 이름을 바꾸게 하니 예의는 마땅히 왕으로 추존(追尊)함을 먼저 해야 될 것이옵니다."

  이 말과 함께 이태조(李太祖)는 자신의 직계 조상 사대(四代)를 높여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로 각각 추존(追尊)하였고, 이 때 세운 원칙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역대 임금의 묘호를 정할 때마다 하나의 규범(規範)이 되었지만, 오늘의 잣대로 볼 때 이 규범을 후대 왕들이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제대로 적용하여 선왕(先王)의 묘호(廟號)를 정했다고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이 묘호 제정 규범을 100% 맞게 적용한 것은 아니지만, (창업한 임금은 아닐지라도) 대체적으로 나라를 중흥시켰거나 큰 국란을 극복하였거나 혹은 반정(反正)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경우 및 선왕(先王)의 적장자(嫡長子) 세자(世子)가 아닌 방계(傍系)의 왕자(王子)나 왕손(王孫)이 계승해 왕실의 새로운 계통을 세웠을 경우에, 세조(世祖)-선조(宣祖)-인조(仁祖)-영조(英祖) 등의 사례(事例)처럼 '∼조()'를 사후(死後) 묘호(廟號)로 사용하였습니다.
 
방계(傍系)가 왕실의 새로운 계통을 세운 것은 어느 면에서는 종묘(宗廟) 사직(社稷)을 공고(鞏固)하게 한 셈이므로, 이를 후대의 사가(史家)들의 냉정한 평가와는 달리 왕실에서는 하나의 큰 공()으로 높이 평가해 '조공종덕(祖功宗德)'
의 규범을 적용시켜 묘호(廟號)를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사후(死後) 평가에 의해 추서(追敍)되는 이 '∼조()'와 '∼종()'의 묘호(廟號) 구분 기준이 실제로는 후대(後代)에 이를수록 그렇게 엄격하게 지켜지거나 일관성 있게 적용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태조(太祖) 이성계 이후 '()'라는 묘호(廟號)를 처음으로 받은 세조(世祖) 임금의 경우이분이 승하하여 종묘(宗廟)에 위패(位牌)로 모셔질 때, 그가 형왕(兄王)인 문종(文宗)을 계승한 적장자(嫡長子)인 조카 단종[端宗 :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당한 폐주(廢主) 임금]을 대신하여 새로운 왕실 계통을 세운 것으로 보고, 그의 계승자(繼承者)인 아들 예종(睿宗)이 세조(世祖)라는 묘호(廟號)를 부왕(父王)에게 바쳤습니다.   

  연산군(燕山君)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당한 단종(端宗)에 이어 조선왕실에서 두 번 째로 폐주(廢主)가 된 임금이라, 종묘에 그의 위패가 봉안될 수 없었으므로 당연히 묘호(廟號)가 있을 수 없었고, 그를 이어 왕이 된 중종(中宗)은 연산주(燕山主)를 대신한 부왕(父王) 성종(成宗)의 계승자로 자처(自處)했기 때문에 새 왕실 계통을 이은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승계(承繼)로 간주하여, 사후(死後)중종(中宗)으로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선조(宣祖)의 경우는 그가 선왕(先王)인 명종(明宗)의 아들도 아니었고, 중종(中宗)의 서자(庶子)인 덕흥군(德興君)의 제삼자(第三子) '이균(李鈞)'의 이름으로 태어나 평범한 종친(宗親)의 신분으로만 지내다가, 평소 그의 인품(人品)이나 자질(資質)에서 왕재(王才)가 있음을 눈 여겨 두었던 명종(明宗)이 마침 후사(後嗣)가 없이 승하할 때 유교(遺敎)를 통해 덕흥군(德興君)의 셋째아들인 '이균(李鈞)'으로 하여금 대통(大統)을 잇게 하라 하여 왕위에 오른 분으로서, 명백히 왕실의 계통을 방계(傍系)에서 새로 내세운 셈이라, 처음 묘호는 선종(宣宗)이었지만 국란(國亂) 극복의 공()에 대한 사후 평가와 더불어 묘호에 대한 재론(再論)이 일어나 '선조(宣祖)'라는 묘호(廟號)를 받았습니다. 그의 생부(生父)인 덕흥군(德興君)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추서(追敍)되었으며, 조선 왕실 최초의 대원군 소생 임금이 된 분이 바로 선조(宣祖) 임금입니다.

  후궁(後宮) 소생이지만 왕위에 올랐던 광해군(光海君)은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과 연산군(燕山君)에 이어 세 번째로 무력(武力)에 의해 왕위에서 축출(逐出)된 임금이라 연산주(燕山主)처럼 종묘에 모셔지지 못한 조선왕조 마지막 폐주(廢主)가 되었습니다.

  단종(端宗)은 적통(嫡統) 임금이었지만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의해 정권을 잃고 숙부에게 양위(讓位)하여 일시적으로 상왕(上王)이 되었으나, 사육신(死六臣)의 반정(反正) 시도가 실패하는 바람에 노산군으로 강등(降等)되어 멀리 강원도 영월지방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목숨을 잃어, 사실상 쿠테타(coup d'Etat)로 서서히 실권(失權)을 당해 결국 왕위에서 물러난 왕이었으며, 종묘에도 모셔지지 못했지만 실덕(失德)하여 폐주(廢主)가 된 임금은 아닌, 어디까지나 양위(讓位)를 하고 물러난 임금이었으므로, 훗날 숙종(肅宗) 때에 복권(復權)이 되어 '단종(端宗)'이라는 묘호(廟號)를 뒤늦게 받아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습니다만, 이와는 달리 쿠테타에 의해 즉각(卽刻) 왕위(王位)를 잃은 연산군(燕山君)광해군(光海君)은 방탕(放蕩)과 패륜(悖倫)의 임금이었기 때문에 끝내 사후(死後) 명예회복을 못한 임금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까지 그 흔한 역대 임금의 후궁 소생 왕자와 왕손 및 공신(功臣)에게나 부여하는 군호(君號)로 격하된 채 초라하게 우리 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선왕(先王)의 적장자(嫡長子)가 아닌 수많은 왕손(王孫) 중 일원(一員)에 지나지 않았던 인조(仁祖)는 반정(反正)을 일으켜 숙부(叔父)인 광해주(光海主)를 축출하고 왕실의 새로운 계통을 세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처음에는 '열종(烈宗)'이란 묘호를 받았으나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종묘사직을 바로 세운 공()과 병자호란의 국난을 극복하여 사직을 안정시킨 공으로 '조종공덕(祖功宗德)'의 논리에 의해 '인조(仁祖)'로 개명(改名)하여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당위성(當爲性)에 대한 의문(疑問)도 있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치(國恥)를 자초(自招)한 임금으로 후대(後代)의 사가(史家)들의 평가를 받기도 한 왕이 바로 인조(仁祖)였지만, 그의 아들 효종(孝宗) 임금과 당시 조정(朝廷)의 신하들 입장에서는 인조(仁祖)가 중흥주(中興主)로서의 공()을 세운 거룩한 임금으로 비쳐졌던 모양입니다

  영조(英祖)
의 경우는 숙종(肅宗)의 후궁 숙빈(淑嬪) 최씨(崔氏)소생이었으나 선왕(先王)이자 형왕(兄王)경종(景宗)이 후사가 없어 그의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조선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고 임진왜란 이후 가위(可謂) 르네상스적()인 중흥(中興)의 기틀을 마련한 임금이라, 사후(死後)에 처음엔 '영종(英宗)'이란 묘호(廟號)로 불렸지만 나중에 '조공종덕(祖功宗德)'의 규범을 적용하여 '영조(英祖)'라는 묘호를 다시 받게 되었습니다.

  영조의 손자(孫子)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었던 정조(正祖)는 선왕의 적장자 신분이 아닌, 그것도 자기 생부(生父)가 조부(祖父) 영조(英祖)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에 갇혀 죽은 이후 일찍이 사도세자(思悼世子)보다 먼저 요절(夭折)효장세자[孝章世子 : 추존(追尊) 임금인 진종(眞宗)]의 후사(後嗣)가 되는 형식으로 조부왕(祖父王)의 어명(御命)에 의해 세손(世孫)이 된 이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서류상(書類上) 정상적 왕위 계승이 아닌 새로운 승계 형식에 의해 즉위한 셈이 되었고, 세종(世宗) 이래(以來) 영조(英祖)에 이어 조선왕조 최대의 문예부흥(文藝復興)을 이룩한 치세(治世)를 보여 준 임금이라, 사후에 처음엔 정종(正宗)으로 추서(追敍)되었지만, 다시 '∼종()'이 아닌 '∼조()' 정조(正祖)로 종묘(宗廟)에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정조 임금의 둘째 아들이자 후궁(後宮) '현목수빈(顯穆綏嬪) 박씨(朴氏)' 소생인 순조(純祖)는 이복형(異腹兄)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부왕(父王) 정조(正祖)가 급서(急逝)하지 11세의 유충(幼沖)한 보령(寶齡)으로 왕위에 오른 임금입니다. 순조는 승하(昇遐) 후 처음에는 순종(純宗)으로 추서(追敍)되었으나, 나중에 '순조(純祖)'로 고쳐 종묘에 모셔졌습니다.

  '영조(英祖)-정조(正祖)-순조(純祖)' 임금이 본디 '영종(英宗)-정종(正宗)-순종(純宗)'이었다가 묘호가 바뀌게 된 것은 해당 임금에 대한 평가(評價)가 달라진 것도 원인이겠지만, 그 분들의 치세(治世) 앞뒤로 실제 임금 위()에는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임금, 즉 추존(追尊) 임금의 묘호(廟號)와 위패(位牌)가 종묘(宗廟)에 열성조(列聖祖)와 함께 봉안(奉安)되었기 때문에 묘호(廟號)가 바뀐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조(英祖)-진종[眞宗 : 孝章世子]-장조[莊祖 : 思悼世子]-정조(正祖)-순조(純祖)-익종[翼宗 : 孝明世子]-헌종(憲宗)

 
어쨌거나 조선왕조의 묘호 조종(祖宗)에 대한 구분 기준은  '조공종덕(祖功宗德)'이었으며, 실제 적용 과정에서는 창업주(創業主) 이외에 방계(傍系)의 왕자(王子)나 왕손(王孫)이 계승해 왕실의 새로운 계통을 세웠을 경우에 '조()', 그 외()에는 '종()'을 붙였는데, 후대에 이르러서는 규범 적용이 제대로 안 되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헌종(憲宗) 사후에 방계(傍系) 왕손(王孫) 신분으로서 보위(寶位)에 오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소생 강화도령 철종(哲宗)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아들인 고종(高宗)입니다.

  선왕의 직계(直系) 후손이 아닌 방계(傍系)로서 새로운 계보(系譜)를 연 세조(世祖)선조(宣祖) 인조(仁祖)의 경우를 본다면 철종(哲宗)과 고종(高宗)에게는 '∼조()'를 붙였어야 하는데, '∼종()'이 되었으며, 특히 고종(高宗)의 경우는 조선왕실(朝鮮王室)의 격()을 높여 최초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제(皇帝)의 위에 오른 분인데도 '∼종()'이 되어야 했으니 말입니다.

  고종황제
의 아드님이신 순종(純宗)황제는 그 묘호가 제23대 임금 순조(純祖)의 처음 묘호(廟號)로 사용했던 것 '순종(純宗)'을 다시 추서(追敍)하여 그 느낌이 여간 찜찜한 것이 아닙니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두 분은 모두 일제(日帝) 치하(治下)에서 황제가 아닌 이태왕(李太王)과 이왕(李王)의 신분으로 격하(格下)되어 망국(亡國)의 한()을 품고 승하(昇遐)하였기 때문에, ()으로 양()으로 일제(日帝)의 압박에 의해 한 분은 고종(高宗)이 되고, 그 아드님은 조상(祖上)께 일시적으로나마 추서(追敍)하였던 순종(純宗)이란 묘호(廟號)를 치욕적으로 다시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조종(祖宗)의 구분 기준은 《태조실록(太祖實錄)원년(元年) 11 6일자(日字) 기록에 의거(依據)한 '조공종덕(祖功宗德)'이 관례(慣例)였는데, 후대(後代)의 자의적(恣意的)인 평가와 적용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그 구분 기준에 대한 이설(異說)이 분분(紛紛)할 만큼 일관성(一貫性)을 유지하지 못 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Friday, May 2, 2014

조경단의 유래

 

조경단(肇慶壇) / 전라북도 기념물 제3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있는 조선 말기의 단(). 

1771(영조 47)에 칠도 유생들은 조선왕조 시조인 사공 이한(李翰)과 동비인 경주김씨의 위패를 봉안하는 시조묘의 건립을 건의하였다 

태종대에 경기전(慶基殿,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을 세웠고 영조대에는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선원경봉지지로서 전주로 숙원을 굳혔는데, 동학혁명군으로 전주가 한때 점령되자 태조 영정과 함께 조경묘 위패도 위봉산성(威鳳山城)에 피난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건지산(乾止山)에는 조경단을, 발산(鉢山)에는 목조의 유허비를, 오목대(梧木臺)에는 태조의 주필유지비를 세우게 되었다. 1899 3 11일에 궁내부특진관인 ‘조경단봉심재신(肇慶壇奉審宰臣)’으로 이재곤(李載崑)이 전주에 와서 건지산 묘소검분이 실시되었다.  

※ 검분(檢分) : 참관하여 검사함.

설단(設壇)·수비(竪碑)·건재(建齋)의 후보지는 따로 지관이 정하기로 하고, 동서 3,360, 남북 3,520척의 경내 묘소는 모두 없애버리고 창경토지나 단의 좌우 계곡에 인접된 전답은 본단 수봉궁에 속하게 할 것을 제언하였다. 마침내 고종 어필의 전제(篆題)와 찬문(撰文)으로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가 건립되었다.

 

조경단(肇慶壇)]의 유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후 전주이씨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를 만들기 위하여 그의 22대조가 되는 시조 사공(司空) 이한(李翰)의 묘가 전주의 건지산(100.5m) 기슭 어딘가에 에 있다는 설에 따라 많은 지사들과 사람들을 동원하여 찾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  

                                    

                                                   

                                          (10)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

                                             

1. 사공(司空) 이한(李翰)──────김씨

                

2. 시중(侍中) 이자연(李自延)

                

3. 복야(僕射이천상(李天祥)

                

4. 아간(阿干광희(光禧)

                

5. 사도(司徒) 삼중 대광(三重大匡이입전(李立全)

                

6. 이긍휴(李兢休)

                

7. 이염순(李廉順)

                

8. 이승삭(李承朔)

                

9. 이충경(李充慶)

                

10. 이경영(李景英)

                

11. 이충민(李忠敏)

                

12. 이화(李華)

                

13. 이진유(李珍有)

                

14. 이궁진(李宮進)

                

15. 대장군(大將軍이용부(李勇夫)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

                                                                                  

이의방(李義方)- 16. 내시 집주(內侍執奏이인(李隣)───────문씨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

 

                                                                                  

                             17. 장군(將軍) 이양무(李陽茂)─────이씨

                                              

                         18.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19.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20. 도조(度祖) 이춘(李椿)

                                              

                          21.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

                                              

                          22.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그후 역대 왕들도 시조공의 묘를 찾기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영조는 묘지를 찾지못하자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조 47(1771) 시조 이한과 배위 경주김씨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祠堂)을 오늘날의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경기전(慶基殿) 경내에 건립하였다.

 

조경단(肇慶壇)은 덕진에서 약 1km 들어간 건지산에 있으며, 광무 3(1899) 5월에 이곳에 단을 쌓고, 비를 세워 전주 이씨 시조의 묘소를 정하고 ‘대한조경단’이라 하였다. 단은 장방형의 돌을 사용하여 둘레를 쌓아 만들고 단의 주변에는 동서남북에 문이 있는 담을 쌓았다.

 

경기전은 전주(全州)의 주산인 기린봉(306m) 아래에 있으며,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서 태종 10(1410)에 창건한 것이다.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난 대한제국 광무3(1899) 고종황제 때인 어느날 우연히 전주시 덕진구 건지산 근처에서 나무를 하던 나뭇꾼의 칼퀴에 이상한 돌 하나가 걸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글자가 세겨져 있었는데, 예사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은 나뭇꾼이 그자리에 표시를 해놓고 고을 현감에게 가지고 가서 아뢰었다.

 

지석의 문구중(文句中)

千一(천일)”은 “왕()” “()” 는 “이십팔(二十八)”은 조선조(朝鮮朝)의 왕 이십팔위( 二十八位)를 의미(意味)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현감이 살펴보니 다름아닌 왕실에서 그토록 애타게 찾고있던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지석(誌石)이였다.

 

묘지석(墓誌石)이라고도 하는 이 지석은 죽은이의 인적사항이나 생전의 전기, 무덤의 소재등을 기록해서 무덤의 봉분속에 묻은 돌을 말하는 것으로서 옛 사람들은 묘의 비석에도 이와 같은 내용을 기록하지만 오랜세월이 지나 비바람에 훼손되고 멸실되더라도 행여 후손들이 묘지를 찾지못하는 일이 없도록 대비하는 목적으로 지석을 묻었던것이다.

 

이렇듯 지석의 중요성은 실로 대단해서 역사학적인 가치가 대단히 높다하겠다. 또한 이것은 무덤의 주인공을 알수있을 뿐만 아니라 무덤 조성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알수있다.

 

예로 공주의 백제 무녕왕릉은 지석문이 나와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실히 알수 있었고, 당시의 역사적 실체를 명확하게 복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고분들이나 신라왕릉들은 이 지석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많은 무덤의 주인공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조경단의 지석(誌石)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는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지석은 조경단 재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천보십삼재구척하(天寶十三載九尺下)`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제35대 경덕왕13(754)으로 추정한다.

 

천보는 당나라 현종의 연호다. 이 지석에는 후손 춘옥(春玉)이가 캐고 이 글을 곤옥(崑玉)이가 해석하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과연 1000여년 후에 춘옥이가 캐내고 곤옥이가 이 돌이 사공공 묘의 지석임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지석문은 다음과 같다.

 

[전면]

千一未白玉午 赤符秦文叔起 口或改三走三返 春玉採崑玉解 馬入海木石崇 天寶十三載九尺下

(천일미백옥오 적부진문숙기 구혹개삼주삼반 춘옥채곤옥해 마입해목석숭 천보십삼재구척하)

 

[후면]

千載之下 中山復起 黃海白馬 己亥五月

(천재지하 중산복기 황해백마 기해오월)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의 설치

 

나뭇꾼으로 부터 지석 발견을 보고 받은 현감은 즉시 한양으로 달려가서 보고하였다. 시조 묘를 애타게 찾던 왕실은 기뻤다.

 

그러나 어느 곳이 정확한 묘인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여 지석이 발견된 능선 주변 남북 3520척의 경내의 다른 묘소를 모두 없애고 단()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주변 어디에는 틀림없이 시조 묘가 있으므로 경내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시조 묘를 후손이나 타인들이 밟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에 대한『고종실록』을 살펴보면 광무3(1899) 125, "전주의 건지산(乾止山)에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우며 관리를 두는 등 문제는 전부 종정원(宗正院)의 의견대로 집행하며 제단 이름은 조경단(肇慶壇)이라 부르고 수봉관(守奉官) 2명은 일가 중에서 특별히 둘 것이다.

 

비석 앞면의 글은 내가 직접(고종을 말함) 써서 내려보낼 것이니 뒷면의 글은 전 대학사(大學士)가 지어 바치도록 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같은 해, 311일 궁중내부 특진관인 조경단심재신(肇慶壇奉審宰臣) 이재곤(李載崑)이 전주에 와서 건지산 묘소 검분(檢分)이 실시되었다. 설단(設壇), 수비(竪備), 건재(建齋)의 후보지는 따로 지관이 정하기로 했다.

 

동시에 창경 토지나 단의 좌우계곡에 건립된 접단을 본단 수봉궁(守奉宮)에 속하게 할 것을 제언, 마침내 고종어필의 전제(篆題)와 찬문(撰文)으로 대한조경단비 건립이 준비되었다.

 

621, 궁내부대신의 대리 민영기(閔泳琦)는 회계원 검사과장 오현기(吳顯耆)와 흥덕군수 오응선(吳應善)을 특별감독으로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들은 장인(匠人)과 공인(工人)들을 잘 정비하여 수일 내에 대한조경단을 준공하게 된다.

 

711, 고종은 시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조경묘(肇慶廟)와 묘지인 조경단(肇慶壇),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慶基殿)의 관리를 맡을 제조(提調)는 해당 도()의 관찰사로 겸임시킨다는 어명을 내렸다.

 

그리고 해마다 한 차례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의의를 한층 높이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왕릉이나 왕실의 묘에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예컨대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李陽茂)의 묘를 준경묘(濬慶墓), 그의 부인 평창이씨 묘는 영경묘(永慶墓). 조경단(肇慶壇)에서 조() `시작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 `경사스럽다`라는 뜻이다.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

 

현재 우리나라 이()씨의 본관은 237본이라고 한다. 이씨는 대체로 한국계와 중국계, 그리고 기타로 나눈다.

 

한국계는 신라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것이다.

 

6성이란 『삼국사기(三國史記) 1권』 「신라본기(新羅本紀)」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9(서기32) 6촌을 개정하여 사성(賜姓)한 성씨들을 말한다.

 

양산촌장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 고허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 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 진지촌장 지백호(智白虎)에게는 정씨(鄭氏), 가리촌장 기타(祈陀)에게는 배씨(裵氏), 고야촌장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를 하사했다.

 

중국계로는 연안이씨(延安李氏), 고성이씨(固城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등과 같이 시조가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다. 기타계로는 안남국(월남)에서 망명해온 화산이씨(花山李氏),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 있다.

 

전주이씨는 현재 인구가 240만 명에 이르는데 한국계인 이알평의 후손이라는 설과 중국에서 귀화한 설로 나누어져 있다. 이 두 가지 설 모두 근거가 모호하여 정확한 생성유래는 전주이씨 종친들조차 단정하지 못하고 있다.

 

작자와 연대 미상인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전주이씨 시조 한()의 자는 견성(甄城)으로 본디 중국에서 살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여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였다.

 

그때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나타난다는 동요가 유행했는데 배씨 성을 가진 자가 이를 모함하였다. 이에 한()이 바다를 건너 신라에 오니 당시 나이 18세였다.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임에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니 신라 문성왕이 불러 사공(司空) 벼슬에 임명하였다.

 

1년 남짓에 국정을 공평하게 다스리니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리고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여 자연(自延)을 낳았고 자연은 천상(天祥)을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 의하면 "이알평의 34세손 이진두(李辰斗)의 둘째 손자 한()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이씨(完山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사공(司空)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배위는 군윤(軍尹) 김은의의 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이씨의 시조인 이거명(李居明)도 이알평의 36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둘은 항렬이 같은 셈이다. 이상으로 볼 때, 전주이씨가 중국에서 왔는지 또는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는지 기록이 애매 모호하여 단언할 수 없다.

 

중국에서 왔다는 설은 아마도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것 같다.

 

왕실의 족보 - 선원선계(璿源先系), 선원세계(璿源世系), 선원파계(璿源派系)

 

임금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한다. ()이란 옥구슬이라는 의미이므로 임금의 조상을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 같은 뿌리`라는 뜻에서 이런 용어를 썼다. 임금은 한 종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임금을 1세로 하여 세대(世代)를 따지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이다.

 

이를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표현하였다. 그래서 전주이씨는 시조부터 17세 이양무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한다.

 

17세까지의 직계와 방계를 모두 포함하는데 시중공파(侍中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등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추존왕인 목조(穆祖) 이안사부터 마지막 순종까지 역대 왕의 세계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한다.

 

추존왕 4대와 태조부터 순종까지 20세를 합치면 모두 24세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목조의 5왕자부터 대군(大君)이나 군()의 파계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한다. 예컨대 양녕대군파, 효령대군파 등이 이에 속한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따르면 현재 86개 파종회가 있다고 한다.

 

 

선원선계(璿源先系) - 시조에서 17세 이양무까지

 

신라 사공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 전주에 터를 잡은 이후 17세 양무(陽茂)까지 호족세력으로 살아왔다.

 

2세 자연(自延)은 시중(侍中) - 3세 천상(天祥)은 복야(僕射) - 4세 광희(光禧)는 아간(阿干) - 5세 입전(立全)은 사도(司徒) - 6세 긍휴(兢休)는 사공(司空) - 7세 염순(廉順)은 호장(戶長) - 8세 승삭(承朔)은 생원호장(生員戶長) - 9세 충경(充慶)은 생원(生員) - 10세 경영(景英)은 생원호장(生員戶長) - 11세 충민(忠敏)은 장사(長史) - 12세 화()는 추밀원사(樞密院使) - 13세 진유(珍有)는 생원호장(生員戶長) - 14세 궁진(宮進)은 한림(翰林) - 15세 용부(勇夫)는 대장군(大將軍) - 16세 인()은 내시집주(內侍執奏) - 17세 양무(陽茂)는 장군(將軍)을 지냈다.

 

이양무는 부인 이씨(李氏)와의 사이에 이안사(李安社), 이영필(李英弼), 이영밀(李英謐), 이영습(李英襲)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안사는 후에 목조대왕(穆祖大王)으로 추존 되어 선원세계(璿源世系)가 된다.

 

영필과 영밀은 자손이 없었고, 넷째 영습은 주부동정(主簿同正) 벼슬을 해 `주부동정공파`의 파조(派祖)가 된다.

 

선원선계의 조상들 중에서 풍수와 관련되어 살펴볼 인물은 3세 천상(天祥) 17세 양무(陽茂). 『완산실록(完山實錄)』에 의하면 "천상은 젊어서부터 매우 호탕했는데, 늦게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을 좋아해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앙관서에 들어가서 천문지리를 연구하다가 9년 만에 이를 달통하여 만물의 이치를 깨달았다.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완산부(完山府) 기린산(麒麟山) 왕자봉(王字峯) 밑에 산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곳에 산소를 쓰면 우리 후세 자손들 중에서 반드시 왕이 나오리니 아무리 괴롭더라도 절대로 천장하지 말라” 고 하였다. 양무는 목조 이안사의 아버지로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濬慶墓)의 주인공이다.

 

전주에 살다가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하자 그곳에서 살다가 고려 고종18(1231)에 죽었다. 신좌을향(辛坐乙向)인 준경묘에는 `백우금관(白牛金棺)`이라는 유명한 설화가 전한다.

 



           ▲서향의 문과 일직선상에 있는 남향의 문에서 20m 떨어진 곳에

             비석이 있다. 비석은 대리석이며 너비 180cm, 두께 30cm, 높이

             202cm이다.

                앞면에는 고종의 어필로 ‘대한조경단’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은 한 변이 7.2m인 정방형의 3칸 팔작지붕이다.

 

=======================================================

 

[어진박물관 유물 확대경] (2)조선왕실 시조의 묘역, 조경단

 

장라윤 기자

 

http://m1.daumcdn.net/cfile219/image/2156473751EC4C2E380CCB

© 관리자

 

조경묘 창건 240주년 특별전과 관련해 역사 유물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시작한 '유물 확대경'.

 

그 두 번째로 소개할 유물은 조경단과 석물이다. 조경단(肇慶壇)은 전라북도 기념물 3호로 지정돼 있다.

 

흔히 조경묘를 시조의 묘역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조경묘(肇慶廟)에 묘는 사당 묘()를 사용, 시조의 사당을 의미하며, 조경단이 조선왕실 시조의 묘역을 의미한다.

 

조경단은 전주 이씨 시조 이한 묘소로 건지산에 위치, 고종 1899(광무 3) 이한 묘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에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일컬었다.

조경단 조성은 대한제국 선포후 황실존숭사업 일환으로, 이후 고종이 친히 ‘대한조경단비’라고 쓴 비를 세웠다.

 

시조묘역을 성역화하여 황제권을 강화하려는 차원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1900년 오목대와 이목대 성지화도 진행한 것.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거두고 귀경길에 오르던 중 전주에 들러 잔치를 벌인 곳이고, 이목대는 목조 이안사가 북쪽으로 옮겨가기 전에 살았던 곳이다.

 

이번 특별전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조경단 지석(肇慶壇 誌石)은 조경단 조성과정에서 나무뿌리를 뽑던 중 발견됐다.

이는 건지산이 시조 묘역이라는 증거 석물. 당시 석물을 찾은 자들에게는 각각 40원을 상금으로 부여했다.

 

‘조경단의궤’에 석물 상면과 왼쪽 면에 51자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귀는 비결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

전반적 해독은 미결 상태.

이후 석물이 나온 곳을 묘소가 있던 자리로 추정하고 봉분을 쌓았다. 조경단 묘역을 그려놓은 ‘조경단 도형’에 ‘의묘소(疑墓所)’라고 표기한 곳이 바로 그 곳.

 

이 봉분 앞에 정방형 제단을 설치했고, 제를 지낼 때는 이 제단에 제상을 차리고 신위를 따로 모시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제단 뒤 봉분이 있고 여기에 시조 혼백이 서려 있다고 보기 때문.

 

그래서 제를 지낼 때 제단 뒤 담자락 문을 열어 혼을 맞이한다고 한다.

이번 전시 준비 과정에서 행방이 묘연했던 지석을 서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확인하였다. 조경단 지석은 몇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북지원에 봉안하고 있었다.

 

기사입력: 2011/08/31 [19:59] 최종편집: ⓒ 전북매일신문

-------------------------------------------------

 

이한(李翰)의 비문(碑文)에 대한  해석문을 찾을수 없어 넷상에서 찾아 본 자료입니다. 참고로 보시기 바랍니다.

 

 
이한(李翰)의 비문(碑文)
 
新羅 35대 경덕왕(景德王 AD. 739~761) 20년에 세워진 시조묘소(始祖墓所) 지석문(誌石文)을 해설해 보기로 한다.
 
2002년을 기준해 보았을 때 1,243년 동안 이한(李翰)의 지석문(誌石文)을 해설하지 못한 것은 古代 해학적, 은유적, 비유적, 그리고 풍자적인 문장으로 엮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비석문 본문을 싣고 한 단락씩 풀어 해설해 보기로 한다. 비석문은 본시 위에서 아래로 적혀 있는 것을 현대기법에 맞추어 옆으로 적고 해설해 보기로 한다.
 
始祖墓所 誌石文
 
干一未 白玉午
赤符奏 文叔起
國或改 三走三返
春玉採 崑玉解
馬人海 木石崇
千寶十三載 九尺下
 
千載之下 中山復起 黃海白馬
 
己亥 五月
 
간일미(干一未), 간일미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즉 하늘인 천간(天干)의 뿌리는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천간인 하늘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上古代부터 祖上 한 사람이 아니고 대대로 이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지석의 문구중(文句中) 천일미(千一未)로 읽고 아래의 해석이 많다.
千一(천일)”은 “왕()” “()” 는 “이십팔(二十八)”은 조선조(朝鮮朝)의 왕 이십팔위( 二十八位)를 의미(意味)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백옥오(白玉午)라고 하는 것은 밝은 天地 흰 옥()을 말한다. 즉 밝은 天地 흰옥이라고 하는 것은 王統 이어온 祖上들은 大明天地 흰 옥처럼 청렴하고 깨끗함을 의미하고 있다.
 
적부주(赤符奏)라고 하는 것은 목숨을 내걸고 眞言 아뢰는 忠臣 말한다.
 
문숙기(文叔起)란 목숨을 걸고 바른 지식을 하는 가문은 흥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국혹개(國或改)란 혹 나라가 바뀌어도 고칠 것은 고쳐야 함을 의미한다.
 
삼주삼반(三走三反)이란 세 번을 달아나도 세 번 모두 돌아온다는 것을 말한다. 즉 죽음을 무릅쓰고 바른 자세를 취한다면 세 번 아닌 몇 번을 핍박받는 한이 있을 지라도 진리의 행위는 세 번 아닌 몇 번이라도 바르게 돌아온다는 것을 나타낸 의미심장한 글귀이다.
 
춘옥채(春玉採)란 봄에 옥을 캐고 가려짐을 말한다. 즉 바른 자세와 진리를 추구한다면 반드시 봄에 옥을 캐듯이 기쁜 경사로움이 있음을 의미한다.
 
곤옥해(崑玉解)란 곤륜산에서 옥을 흩어지게 함을 말한다. 즉 곤륜산에 깊이 숨겨져 있는 옥을 발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진리의 행위를 한다면 성취될 수 있음을 뜻한다. 世界에서 가장 有名 곤륜산의 옥을 캐어 낼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다진 글이다.
 
마인해(馬人海)란 대지의 넓은 땅을 달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즉 올바르고 바른 행위를 한 사람은 말을 타고 넓고 넓은 대륙을 마음껏 자유로이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한 문장이다. 여기서 마인해(馬人海)하는 해()자는 바다해자 이지만 진짜 바다가 아니고 고대에는 넓은 벌판을 바다로 비유했던 것이다.
 
목석숭(木石崇)이란 이상과 같이 역사에 남을 만한 현인은 나무가 돌이 되어 영원히 추앙받는 인물(人物)로 남을 수 있음을 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천보십삼재(千寶十三載)後唐 천보(天寶 AD. 742~756) 十三년이란 뜻이다. 이때가 기원후 755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李翰()한 때가 기원후 755년이라면 乙未年 해당된다. 하지만 비석문의 마지막에는 4년 후인 AD. 759己亥 五月 되어있다는 것으로 보아서 李翰 죽은 후 4년 뒤에 비문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또한 千寶十三載 다른 뜻은 천개의 보물을 열세번이나 실었다는 뜻이다. 즉 훌륭한 인물은 천개의 보물을 열 세 번이나 싣는 것처럼 歷史 보옥처럼 길이 남을 것이란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문장이다.
 
구척하(九尺下)란 아홉 척의 비석이 조금 못된 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뜻은 아홉 척의 아래란 것은 완벽한 인간을 상징한 聖人 말한다. 왜냐하면 九尺이란 우주가 9층으로 되어있고 자연과 인간은 모두 아홉 겹의 층으로 되어있다.
고로 보통사람 보다는 훌륭하고 聖人보다는 아래에 속함을 뜻하고 있다. 다시 말해 대성인의 반열은 아니지만 賢人다움을 나타낸 문장이라고 보아진다. 그런데 본문에서 九尺下 것은 九尺可 것 같다. 그것은 비석이 九尺 가깝다는 것은 거의 賢人이나 聖人 비길 만하다는 뜻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는 자인 것 같다.
 
천재지하(千載之下)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나 충신이라 할지라도 천년을 넘지 못함을 의미하고 있다.
 
중산복기(中山復起)란 훌륭한 인물이 있었던 집안에서는 천년을 갈 수 없지만 그 대신 한 가문에서 훌륭한 인물이 다시 태어나 집안을 일어나게 할 수 있음을 뜻하고 있다.
 
황해백마(黃海白馬)란 지금의 황해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황금의 넓은 땅인 대륙을 白馬 타고 마음껏 달릴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집안이나 나라는 四海, 全世界에서 당당하게 이름을 날리면서 白馬 타고 달리는 것처럼 존경받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문장이다.
 
이상의 지석문(誌石文)後唐천보(天寶 AD. 742~756) 13년이므로 AD. 755년에 李翰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가 新羅 35대 경덕왕(景德王 AD. 739~761)16년이면 기원후 755년이다. 그러나 지석문 마지막에는
 
己亥 五月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李翰 4년 후인 AD. 759년에 지석문을 쓴 것으로 보인다.
 
묘비문을 보면 한 인간이 인간답게 훌륭한 자세로 역사에 남는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강조한 글귀이다.
 
李氏의 뿌리歷史.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no=10249
 

 

 

------------------------------------------------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 (조경단肇慶壇)

   

이한(李翰)은 신라 때 사공(司空)이었으며,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 21대손이다.

 

이성계는 함경도 출신이지만 고조할아버지 이안사(李安社)는 전주인이었는데, 고을 감사(監司)와 사이가 나빠지자 강원도 삼척으로 옮겨가 살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감사가 그리로 부임함에 따라 다시 북간도(北間島)로 이주하여 원()나라에서 지방관을 하였다. 아들 이행리(李行里)와 손자 이춘(李椿 이성계의 할아버지)은 두만강 가에 살면서 이춘과 아들 이자춘(李子春)은 원나라의 천호(千戶)라는 벼슬을 하였다.

 

고려가 원나라를 치자, 함경도 함락에 공을 세웠고, 이성계도 부친의 뒤를 이어 고려의 병마사(兵馬使)가 되었다.

 

전주의 진산(鎭山)인 건지산(乾止山)이 북쪽으로 높이 솟고, 남쪽은 완산(完山 南福山)이 가까이 있으며 동쪽의 고덕산(高德山 高達山) 기린봉(麒麟峰)과 한편으로 서방산(西方山) 청량산(淸凉山)이 서로 자웅을 겨루며 앞뒤로 솟아 서쪽으로 가연산(可連山)이 낮게 기봉하였다.

 

건지산(乾止山)은 산세가 많이 끊어져서 붙인 이름이라한다. 물길의 수세(水勢)는 북쪽 고산(高山)의 남천(南川)하류가 삼례읍(參禮邑)의 추천(楸川)과 합류한다.

 

정감록비결에 나오는 정감(鄭鑑)과 이심(李沁)이 건지산에 이르러 이곳에 두 군데의 명당이 있는데,

 

둘이 하나씩 쓰기로 하고 정감이 먼저 양보하여 이심이 먼저 쓰니,

정감이 말하기를 "그대는 앞으로 500년 뒤 고려가 망하면 왕조를 이룰 것이나,

 

나는 1000년 후에야 빛을 보게 되었으니 이게 운명이오."하였는데, 이들이 쓴 묘는 얼마 뒤에 폭우로 연못이 되고 말았다.

 

 

<권근(權近)의 시>

 

큰 진산(鎭山)이 남북을 갈라놓니, 완산(完山)이 가장 기이하도다(巨鎭分南北 完山最是奇)

 

천년의 왕기(王氣)가 모였으니, 일대(一代)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千年鍾王氣 一代啓鴻基)

 

과연 이한(李翰)의 묘를 잃고 500년 뿌리내려 살다가 이안사(李安社)대에 전주를 떠났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이후 영조(英祖47) 조경단(肇慶壇)을 세워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광무2(1899)에 한 나무꾼이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1000년 뒤 시조의 묘를 찾게 되었다.

 

전주는 서북방이 터져 공결공허(空缺空虛)하였으므로 9천 척 높이의 둑을 쌓았는데, 이게 덕진(德眞)이며 안으로 조성한 연못이 덕진지(德眞池)이다.

 

기린봉(麒麟峰)을 중조봉(中祖峰)으로 무려 36()의 기복(起伏)과 을진손사(乙辰巽巳 동남방)방향에서 다시 손진방(巽辰方)으로 용맥이 달려가다가 을진손사(乙辰巽巳) 용맥으로 갑묘(甲卯 동방)방에서 산이 순하게 박환(剝換)하여 을진(乙辰)에서 작뇌(作腦)하였다.

 

()방향에서 수두(垂頭 머리르 드리움)하여 입수(入首)에 묘좌(卯坐)이며 천을(天乙) 태을(太乙)이 귀봉(貴峯)으로 좌우에 옹호하여 산세는 멀리 배합하고, 지덕(地德)은 천년이 융왕할지라 맑은 물이 양방 득수의 물길이 합수한다.

 

-----------------------------------------------
전주이씨 시조 배위(配位) 경주김씨(안산김씨 상계)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삼게 되니 이분이 바로 경주김씨(안산김씨 상계)이다.

위의 인연인지 조선초기 전주이씨(왕족)와 안산김씨의 통혼이 이어진다.

아래는 본인의 직계 선조 계보로 찾아본 통혼기록이다.

 

조선 정종 딸 고성옹주 안산김씨 김한 하가 - (연성군 김정경 아들 김한)


17대조 (휘 한) 수록대부(綏祿大夫) 의빈계(儀賓階) 1,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배위 전주이씨(고성옹주)

 

-----------------------------------------------------

양녕대군 아들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 (안산군 김개 사위)http://blog.daum.net/yescheers/8598106

서산군 이혜는 양녕대군의 아들이며 17대조 김개의 사위이다.

위의 지중추부사 김한은 김개의 동생()이다.

 

-----------------------------------------------------

15대조(휘 김필) (문과장원, 증 부제학) 배위 전주이씨


숙부인 이씨 : () 오원군 이보정 (정종대왕 증손자)

 

----------------------------------------------------- 

성종의 손자 태안군 이팽수(全州李氏) 배위 안산김씨


이팽수는 성종(成宗)의 친손자로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 5남이다.

군부인 김씨 ()() 이고 영의 5대조 定卿(정경)은 원종공신, 좌명공신이다.

 

-----------------------------------------------------

5대조(휘 호원) 배위 전주이씨 

() 현문(顯文전주이씨 후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