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7, 2012

전주이씨 족보

전주 이씨 (全州李氏) 전주이씨 홈으로이동

1> 시조 : 이 한[李 翰]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 마한의 원산성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에 완산 또는 비사벌, 비자화 등으로 불리우다가 555년에 완산주로 하였다.
그후 경덕왕이 완()을 의역(意譯)하여 전주로 고쳤고,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한때 안남도호부라 하다가 공민왕이 완산부로 하였다. 조선 태조때는 선조의 고향이라 하여 완산 유수부로 개칭하였다가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 전주시로 개편되었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 이한(李翰)은 신라때 사공(司空)을 지냈고,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군윤 김은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인 대성의 연원을 이루었다. 그후 시조의 아들 자연(自延)이 시중을 역임했고 손자 천상(天祥)은 복야를 지냈으며, 증손 광희(光禧)는 아간을, 현손 입전(立全)은 사도를 역임하는 등 신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5 세손 용부(勇夫)에 이르러 고려조에서 흥무위 대장군을 역임하였다.

그후 그의 아들 린()이 내시집주로 시중 문극겸의 딸게 장가들어 17세에
양무(陽茂 : 좌우위 중랑장을 역임)를 낳았으며, 상장군 이강제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양무는 18세에 안사(安社)를 낳으니 이분이 바로 이태조의 고조부인 목조(穆祖)였다.
호방한 성품으로 신망을 받았던 목조는 처음에 전주에 살다가 산성별감과 사이가 나빠
강릉도 삼척현으로 이거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강릉도의 안렴사로 임명된 자가 바로
그 산성별감이어서 목조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삼척을 떠나 함길도 덕원에 정착하였다가
원나라에 귀화하여 알동(斡東)땅으로 이주, 원주민 5천호를 다스리는 다루하치(원나라 벼슬) 되니 이때가 고려 고종조였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동북 방면 사람들이 모두 목조에게 쏠려 쫓으니 이씨 조선 왕업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목조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세습한 익조(翼祖 :이행리)는 원나라 세조를 도와 왜인정벌에 참전했고, 원나라에 귀화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본국에 있었다.
익조가 부인 최비(崔妃)와 더불어 낙산 관음사에서 기도하여 낳았다는 탁조(度祖)의 장자 완창대군 자흥(子興)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차자 환조 자춘(子春)은 원나라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千戶)를 지냈으며,
셋째인 완원대군 자선(子宣)은 완산백에 봉해졌다.

1315년에 출생했던 환조 자춘(子春)은 공민왕의 북강 회수정책에 내응하여 쌍성을 함락시켜 함주 이북의 땅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대중대부 사복경이 되어 저택을 하사받았으며, 판군기감사로 서강 병마사를 겸하여 왜구 침입을 토벌하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렸다.

슬하에 3 1녀를 두었던 환조의 장남 원계(元桂)가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환조의 둘째 아들 화()는 두차례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때
영의정에 올라 대군(大君)에 진봉되었다.

1392(태조 1) 7 16일 송경 수창궁에서 즉위한 태조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순종까지 27명의 왕이 519년간 지속한 조선왕조의 기초를 세웠던 태조 이성계(李成桂) 환조(桓祖) 자춘(子春)의 셋째 아들이며, 시조 이한(李翰) 22세손이다.

한국 최대의 벌족으로 발전해온 전주이씨는 대소 120여 파로 갈라져서 세계를 이어왔다. 99파로 알려져 있으나 후사가 없는 대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99(대군: 25, : 74)

전주 이씨의 인맥으로는 세종의 아들 밀성군 침()의 계통에서 6명의 정승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여 주목을 끌었고 정종의 아들 덕천군 후생(厚生)의 계통에서는 영의정 1명과 대제학 3명을 배출시켰고, 정승 3명을 배출시킨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세종의아들 여), 정승 2명의 선성군파(宣城君派: 정종의 아들 무생), 정승 1명과 많은 문무관을 배출해 낸 효령대군파(孝令大君派: 태종의 둘째아들 보)와 함께
화려한 명맥을 이루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진안대군 방우(芳雨)가 고려말 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을 때 밀직부사로 명나라에
그 정변을 설명하러 갔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해주에 은거하였다. 무안대군 방번(芳蕃)의 후는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 여()가 세종의 명을 받아 양자로 들어가 후계를 이었는데, 그의 아들 부()가 이시애의 난에 공을세워 종실의 현자로 불리웠다,.

정종의 인맥으로는 선성군 무생(茂生), 진남군 종생(終生), 덕천군 후생(厚生),
무림군 선생(善生)의 후손들이 유명하다. 선성군 무생의 증손 학정(鶴丁)의 아들 양원(陽元) 광국 3등공신으로 한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우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으로 적군을크게 대파한 후 영의정에 올랐던 양원은 의주에 피란 중이던 선조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했다는 와전된 소식을 듣고 "국사를 가히 어찌 할 도리가 없다"하며 나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겠다면서 절곡(絶穀) 8일만에 피를 토하고 순절하였다.

군수 극인(克仁)의 아들 홍주(弘胄) 40년간 벼슬을 지내고 영의정에 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 초막뿐이었고 한뙈기 공원에는 대()와 화초가 조촐하게 피어있었다고 하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문묘의 중수비문을 남겼다.

진남군 종생(終生)의 후손에서는 수창부정 칭()의 아들 헌국(憲國)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다스리는데 공을세워 평난3등공신에 오르고 선조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호성3등공신으로 완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덕천군 후생(厚生)의 아들 효백(孝伯)은 이복(李復), 이형(李衡)과 더불어 당대에 활잘 쏘는 [칠사종(七射宗)]으로 불리웠으며, <원교집(圓嶠集)>에 의하면, 그의 무덤이 광주(廣州) 도논리에 있는데 그터는 효백이 평소에 활을 쏘고 사냥하던 곳이다.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 []는 왕세자로 봉해졌으나 세종의 현명함을 위해서
<창광자자(猖狂自恣)>하여 세자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방랑하였었다.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 보()는 불교를 깊이 믿었다. 직언(直彦: 효령대군의 5대손)
우찬성에 이르러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이조판서양의 손자 명()은 인조때 병자호란 후 고갈된 재정을 맡아 국고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물가를 안정시켜 한국 재정(財政)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활을 잘 쏘아 장거리 사수로 이름을 떨쳤던 성녕대군 []의 후손에서는
<지봉유설(芝峰類說)>, <찬록군서(纂錄群書)>등 수십종의 명저(名著)를 저술하여
명망을 떨쳤던 수광과 억울한 사람을 너무 많이 구해주어서 지옥에서도 계속 영의정을
지내고 있으리라는 성구(聖求 : 수광의 아들)의 부자가 유명했다.
특히 성구는 인조때 기생 제도를 폐하여 모두 고향에 돌려 보냈던 일로 이름을 떨쳤고,
양화강(楊花江) 위에 집을 짓고 살 때에 집에 불이 났었는데, 그는 밭뚝에 나와 있다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도 않고 "술독은 탈이 없느냐. 술을 따라 이웃 사람들에게
사죄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익녕군 []의 후손에서는 정은(貞恩)의 증손 원익(元翼) <오리정승(梧里政丞)>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세종의 아들 18형제 중 가장 명맥을 이룬 밀성군 침() 5대손 수록(綏祿)은 광해군때 원익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양근에 물러가 살았으며, 그의 아들 경여(敬與)가 가난한 일생을 살면서 기국(器局)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그외 전주 이씨를 빛낸 인물로는 완원군 수의 증손 몽설(夢設)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고 보령에 은거하여 향풍(鄕風)을 세웠고, 그의 아들 성()과 원은 학명을 떨쳤다. 진의 아들 상질(尙質)은 학문이 현달하여 <삼유신(三儒臣)>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그의 아들 훤은 언간(言諫)으로 절의를 세워, 대제학으로 청백리에 녹선된 손자 조()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순조때 우의정을 지내고 명문장가로 시명(詩名)이 높았던 서구(書九)는 박제가, 이덕무,
류득공 등과 함께 <한시(漢詩) 4대가>로 손꼽혔으며, 승지 득일(得一)의 아들 상황(相璜)은 순조때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러, 헌종때 우의정으로 [순조실록]을 편찬했던 지연(止淵), 철종때 좌의정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았던 헌구(憲球), 흥선 대원군 하응(昰應),철종때 영의정 재원(載元),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승만(承晩) 등과 함께 가문을 빛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남한에 총 558,019 가구 2,379,5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연천군 중면 도연리
평북 정주군 신안면 연봉리

충남 부여군 초천면 추양리
평북 정주군 고덕면 관해리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함남 북청군 평산면 용전리

전남 나주군 금천면 완곡리
함북 길주군 동해면 석성동

경북 문경군 가은읍 왕릉리

[출처] 전주이씨 족보|작성자 헌터리

[출처] 전주이씨 족보 |작성자 zip8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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