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13, 2017

군산중학교의 충혼탑과 학도병


내가 겪은 6.25 사변.

1950년도는 학제가 변경 되어서 5월에 새 학기가 시작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군산중학교 5학년이 된 것이다. 지금 학제로 치면 고등하교 2학년에 해당 되는 것이다. 야, 이제는 5학년이 되였으니 대학 입시 준비를 해야지 하고 벼르던 차 이었다. 학교 끝나고 군산 역으로 가기 전에 영동 에 있는 책방을 둘러 뭇은 책을 살가 연구하던중 6월 25일 이 온 것이다. 이날은 일요일 이라서 복숭아 과수원에서 이른 복숭아를 한 배낭 따서 새벽갈이 일러나서 십리길을 짊어지고 지경 역에서 기차를 타고 군산 청과시장에 팔아서 내가 원하는 책 을 사려든 것 이었다.

군산 청과시장에서 돈을 찾아서 영동 책방에 가서 내가 원하는 미적분책 (그랜빌 스미스 롱리저, 이임학 번역) 와 영어 참고서를 사갖이고 막 책방을 나오려든 차 12 시경에 군산 경찰서 에서 비상소집 사이렌이 연속 열 번 정도 울렸다. 뭇은 비상사태가 터졌나 하고 의아하든 중 군산 기차역을 나가니 38선이 터졌다고 수근 거리는 소리를 듣고 기차를 타고 집 에 왔다.

그 다음날 26일 에도 평상시 같이 지경 역에 통학 기차를 타려고 나갔으나 통학열차가 군용으로 징발되어서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걸어서 30리를 학교에 가니 일 교시 가끝니고 2교시가 되는 겄이였다. 걸어서 30리를 통학 하면서 거리에 흘러나오는 래듸오소리는 음악 특히 제헌절 노래가 많이 들리고 기타 뉴스는 별로 없었다. 전황이 대단이 불리 하는구나만 짐작 하고 서 이런 식으로 7월10일 까지 30리를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이날 7월10일 학교를 가니 상급학년 교실이 텅 빈 게 아닌가. 그래서 교무실로 가서 알아본 결과 조회때 4,5,6 학년을 선생님들이 인솔 해 갖이고 군산국민하교 로 갔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어서 안일이지만 군산국민학교 에 군산중하교를 비롯하여서 군산상업학교, 군산사범학교 등 의 학생을 소집해놓고 전북지구 병사구 사령부 모병관이 나와서 조국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있는데 젊은 우리 학생들이 총궐기해서 공산침략응 막아 내야 하지 않겠는가 일장 연설을했다는것이다. 그러니 학생들이 옳소, 나가서 싸웁시다. 총궐기합시다. 하고 7월 14일 자원입대해서 군번도 없이. 그 당시 김석원 부대에 포항 전투에 투입 되었다 고한다. 전국 중학교 중에서 최다 희생자를 낸 학교가 군중 출신 학도병 이였다고 한다. 수복후 흙석동 한강변 에 학도의용군 전몰위령비를 김석원 장군 이 세웠는데 그 당시는 우리 군중출신 학도병 위령탑이 된 것을 몰랐든 것이다. 물론 무명 학도의용군 전채를 기리기 위한겄이였겟지만. 그런 후 학교는 나가지 않고 7월15일에 공산군이 들어온 후 피신생활이 시작 한 것이다. 공산치하 3개월 공포정치를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나는 재주가 없어서 난감할 뿐이다.

人生之事(인생지사) 塞翁之馬(새옹지마) 라 했던가.

옛날 중국의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준마 한필이 사전에 보고 없이 무단가출을 했다. 사람들은 노인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지만, 노인은 어쩌면 이게 福이 될지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가출을 했던 말이 다른 말을 감언이설로 꼬셔서 데리고 들어왔다.
사람들은 이번에는 축하의 말을 했지만, 노인은 이게 나중에 나쁜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고 까불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를 크게 다쳐 신체장애등급1급 판정을 받았다. 사람들은 얼마나 상심이 크냐고 위로의 말을 했지만,, 노인은 이번에도 이게 福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후 북쪽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마을의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대부분 전사했지만, 노인의 아들은 한쪽다리를 못쓰게 된 탓에 징집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따라서 현재 좋지 않아 보이는 일들이 앞으로는 복이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왜 내가 인생지사 쇄옹지마 란 무구를 끄집어냇는가 하면 이때 1950년 7월10일에 학교 조회에 참석 했더라면 틀림없이 학도병으로 자원입대 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포항전투에 투입되여서 전사 했을 가능성이 90% 이상 이였을 겄이다.
 
해방전해에 창오소학교의 일회 조업생중에 서 중학교 하나 들어가지 못했다. 아마 중학교 입시시험을 본 사람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행이 해방덕분에 2회 부터는 중학교를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게 이 촌놈들에게는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새벽밥을 먹고 십리를 걸어서 지경에서 기차를 타고 30리를 가서 통학 하는 데 그 당시 해방직후 혼란기에 통학 기차가 매일 연발, 연착 해서 저녘에 집에 오면 저녁 12시 경이 대부분이 이었다 이런 생활을 6년간 하면서 우리네 조상들이 좀 지리적으로 편리한곳에 정착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이다. 아마 군산 인 접면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던 학우들은 이날 아침 조회에 참석 하게 되었고 포항전투에서 알려진 바에는 전국적으로 최다 96명 전사자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생지사 쇄옹지마 란 문구를 인용 한 겄이다.
 


군산중학교의 충혼탑과 학도병

무명용사로 산화한 학도병 애국충정 기려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구국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출정한 학도의용군, 즉 학도병들은 자신의 허리춤보다 긴 무거운 총을 메고 각군에 배속돼 활약했다.
막상 조국을 위해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고 총탄이 오가는 전장에서 겪었을 이들의 고통은 상상을 불허한다. 대부분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죽음의 공포 속에 하나 둘 적탄에 사라져 갔다.
어느 병사의 수첩에는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처럼 고향과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짖으며 눈 덮인 산과 들에서 포연 속에 젊음을 희생한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무덤조차 찾기 어려운 무명용사들도 있다. 일부 통계에는 5만여 학도병 참전자 중 7000여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전국 학도병 관련 전적비·참전비·충혼탑 등은 약 40개 정도에 이르지만 각 학교의 학도병이 정확히 집계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군번을 배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출정했고 전사자의 경우 후손도 없다.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추모할 장치가 미흡했던 것이다. 각지의 동창회나 학도병 출신 대선배들이 이런 일에 뜻과 정성을 모은다면 늦었으나마 다행스럽고 순조로운 일일 것이다.
2004년 7월 14일, 전북 군산의 군산중학교. 그곳 교정에서 충경원 준공식이 거행됐다. 그곳 출신 학도병의 출정 54주기를 맞아 추모제를 겸한 행사였다. 원내에는 6·25전쟁 당시 희생된 교장선생님 영모비(永慕碑)와 함께 충혼탑(忠魂塔)이 있다. 2003년 건립된 충혼탑은 이 학교 참전자 240명과 65명의 전사자를 추모하고 애국 충정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전쟁기념관에 이 학교 출신으로 등재된 97명과 이후 조사된 7명, 합계 104명의 명단을 조사한 결과 현재까지 65명의 전사자가 이 학교 출신으로 확인됐다.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가 이 학교에서 배출됐고, 경북중·전주북중·경주중·서귀포중·군산상업중·순창농업중·서울중·용산중 등이 뒤를 잇고 있다.
당시의 중학교는 오늘날의 중·고등학교가 통합된 체제였으므로 학도병 참전자는 주로 고학년이 대부분이었다.그동안 뜻은 간절했으나 안타까움만 가득했던 학도병 출신의 선배들, 각자의 삶을 추구하느라 대선배의 눈물 어린 희생과 고통을 미처 감싸드리지 못한 후배들, 지역의 민·군·관이 함께 전사자를 추모하는 뜻 깊은 순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