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16, 2015

기독교와 제사문제


기독교와 제사문제

■ 기독교인들은 왜 제사를 안 드립니까? 그것은 조상공경의 미풍양속에 반하는 것 아닙니까?

■ 유교식 제사를 우리의 전통문화로 봐야 합니까? 아니면 우상숭배로 봐야 합니까?

기독교는 추도식·추모예배로 제사드리는 것 전통문화 더 수용할 추모예식 생각해 볼만


기독교인들은 왜 제사를 드리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기독교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진 질문입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적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그것을 흔히 ‘추도식’ 또는 ‘추모예배’라고 부릅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유교적 방식으로 제사를 드려온 데 비해 기독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종종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230여년 전에 이 땅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제사 문제로 인해 천주교인들이 모진 박해를 받았던 것은 이미 잘 아는 사실입니다. 16세기에 중국에 들어갔던 예수회 신부들은 중국인들의 조상숭배 전통과 풍습을 훼손하지 않았고, 중국의 문화를 적극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유교의 상제(上帝)와 같다 하여 하나님을 천주(天主)로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도미니칸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토착문화를 수용하는 예수회의 선교방식에 반대 입장을 취했고, 이 문제는 나중에 로마교황청과 중국황실과의 갈등문제로 비화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교황 클레멘트 2세는 1715 3 19일에 교서를 발표해 전 세계 가톨릭 교인들로 하여금 조상제사를 금하게 했습니다.

1784
년에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 땅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이승훈, 정약용, 이벽, 권일신 등은 교황청의 지침대로 조상제사는 하나님 숭배에 반대되는 미신이라고 가르쳤고, 이로 인해 수많은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소위 천주학(天主學)과 유학(儒學)의 갈등이 한국 땅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의 권력층은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라고 박해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거쳐 온 가톨릭은 1939년에, 교황 파이우스 12(Pius ?)에 의해 조상제사를 허용했습니다. 교황청은 “문화와 전통적 습관의 의미가 바뀌었으므로 조상제사는 하나의 시민적 미풍양속일 뿐, 종교적 의식이 아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65년의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은 전통문화에 더욱 개방적인 입장으로 바뀌었으며, 지금은 적극적으로 우리의 전통적 제사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가톨릭 보다 100여년 후에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한국의 조상제사 문제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마펫(S. A. Moffet, 18641939) 목사는 1893년에 신자의 규범을 만들어 세례훈련의 교재로 삼았는데, 그 규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신(邪神)우상숭배 금지, 조상제사 폐지, 주일성수, 부모공경, 축첩(蓄妾)엄금, 가정의 순화(자녀에 대한 예우), 음주 도박 도둑질 간음 거짓말 등의 악습폐지, 근면성실하게 일해 가정생계를 풍족히 할 것” 등. 원입교인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3개월 동안 이러한 교육을 시킨 후 그 내용을 지키기로 서약하면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개신교 역시 가톨릭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겼고 그 관념적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사문제가 크게 사회문제가 된 것은 1920년입니다. 동아일보 1920 9 1일자 보도에 의하면, 경북 영주에 살던 권성화라는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조석상식(朝夕上食)을 폐지했습니다. 그의 아내 박씨는 효성이 극진하여 시어머니의 조석상식을 지성껏 모셔왔는데, 남편이 이를 금하자 불효(不孝)의 죄를 죽음으로 갚기로 작정하고 시어머니의 신주(神主)를 뒷동산에 묻은 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동아일보는 “애매 무죄한 기독교의 희생자! 남편이 예수교를 믿어 상식(上食)을 폐한 결과 며느리가 대신 죽어”라는 표제로 대서특필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의 제사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온갖 비난이 기독교에 퍼부어졌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동아일보 기자가 당시 YMCA 총무였던 이상재 선생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그는 조상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조선의 제사는 일신사상(一神思想)에 위배되지 아니한다.” “선조기념과 우상숭배는 별개의 것이다.” 등의 제목의 기사를 3회에 걸쳐 게재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사설도 있었습니다. “제사란 선조의 영혼을 위로하고, 망각하지 아니하고 사모하는 예()인즉, 예수교도 영혼의 존재를 믿는 이상, 그 영혼 앞에 절하는 것이 왜 미신이며 우상숭배인가? 예수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대개 무식한 천민들만이 입교했기에 선교사들에게 조선문화를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결과 선교사들은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가르치게 되었다. 만약 초대 교인들이 지식인들이었다면, 제사의 유래와 정신을 바르게 선교사들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제사의 폐단은 고쳐나가야 하되, 예수교인들이 제사를 우상숭배로 아는 것 역시 고쳐야 한다.(1920 9 10일자 동아일보 사설) 이 사설은 유학자 출신 기독교인이 썼다고 알려져 있고, 당시 지식인들의 생각은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설의 주요 내용은 지금도 고려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사건들의 여파로 기독교에서는 조상제사를 대신할 수 있는 추도식(또는 추모예배)을 강화하게 되었고, 조상의 사진과 촛불 등을 포함해서 조상을 추념할 수 있는 내용들을 보충했습니다. 서양의 전통에서는 가족들이 묘소에 찾아가서 꽃을 바치고 간단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끝내지만, 우리나라의 기독교적 추모예식은 어느 정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추모예식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영선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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