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0, 2012

전주이씨 시조 의묘 - 조경단 [肇慶壇]

조경단 [肇慶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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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atic.naver.com/100/images/icon_sum.gif요약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있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의 묘소.

지정종목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전북기념물 제3

지정일

1973 06 23

소재지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산 28 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mapView.gif

크기

면적 30,248





1973 6 23일 전라북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덕진시민공원 내 건지산(乾止山) 줄기에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한은 조선 태조 21대조로, 태조는 묘역을 각별히 수호하도록 하였으며 이후의 역대 왕들도 정성을 다하여 보호하였다.

특히 고종은 1899(광무 3) 5월에 이곳에 단을 쌓아 당상관을 배치하고 비석을 세워 전주이씨 시조의 묘로 정하고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해마다 한 차례 제사를 지내고, 단을 중심으로 450정보의 단역을 마련하였다.

이는 경기전, 조경묘와 함께 전주가 왕조 전주이씨의 발상지라는 의의를 한층 현실화한 조치였다. 전주이씨 선원계보에 따르면, 신라시대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을 시조로 18대인 목조까지 전주에 기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태조 22).

1만여 평의 경내에 주변을 돌담으로 쌓고 동·서·남·북문을 두었다. 조경단 남쪽 20m 지점에는 고종이 세운 비석이 비각에 안치되어 있다. 거북등 위에 세워진 비석은 너비 1.8m, 두께 0.3m, 높이 약 2m로 거대하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비석 앞면에 새겨진 ‘대한조경단’이라는 글씨와 비문은 고종의 어필이다. 비각은 한 변이 7.2m 정사각형 3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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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의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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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atic.naver.com/100/images/icon_sum.gif요약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豊南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각.



소재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 102




경기전 본전 /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곳으로 주변에는 조선시대 왕들의 초상화가 있다.

1991 1 9 사적 제339로 지정되었다. 1410(태종 11)에 임금은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御容殿)이라 하였다. 경기전은 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주에 세운 전각으로, 세종 때 붙인 이름이다.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14(광해군6)에 중건하였다. 보호면적은 49,590㎡이다.

경기전의 경역은 정전(正殿) 조경묘(肇慶廟)로 나뉜다.

정전(보물 1578)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보물 931)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 측면 3칸 규모이다.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 및 갑석(甲石)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다포계(多包系) 형식의 맞배집으로,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添閣) 세워 배례청을 시설했다. 마치 능침(陵寢) 정자각(丁字閣)과 같은 형상이다. 이 첨각 기단의 3면에 벽돌을 깐 보도를 연결하였다.

조경묘는 정전 북쪽에 있다. 태조의 22대조이며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1771(영조 47)에 지은 것이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경기전 조경묘 도형의 그림을 보면 지금은 없어진 전사청(典祀廳) ·동재 ·서재 ·수복방 ·제기고 등 부속건물들과 별전이 따로 있는 광범위한 성역이었다. 전주시가 관리하고 있다.


전주 경기전

◆ 전주 경기전 일원 - 2001년 11월 16일(금) 전주문화탐방 ◐ 날씨 - 맑음

16:00

- 출발(전북대 삼성문화회관)

16:15

- 풍남문 전동성당 경유 경기전 도착

17:00

- 경기전 출발 → 강암 서예관으로

17:30

- 강암 서예관 출발 →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으로

◆ 여 행 록


경기전은 전주 이씨만의 유산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나는 이번 문화탐방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위와 같은 명쾌한 생각을 갖지 못했었다. 경기전, 조경묘, 조경단, 오목대, 이목대 등의 유적지를 떠올리면 그저 전주 이씨와 관련있는 문화재로만 치부해버리곤 했다. 하지만 2001년 11월의 가을 문턱에서 우연히 갖게된 짧은 시간의 전주 문화유산 탐방은 그 동안 막연히 가졌던 나의 오만한 편견을 치유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번 탐방을 통하여, 예전에 서너 번 경기전을 아무런 느낌없이 휘둘러보고 나오며,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있는 곳' 이라고만 단순히 느꼈던 나의 무지함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11월 16일 오후 4시경, 전북사대부고 주최로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서 열린 교실 수업 개선 워크숍 일정을 끝내고, 문화탐방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문화탐방지역이 평상시 그다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곳이었기에, 사실 별 흥이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심 마지막 늦가을의 정취를 혹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버릴 수 없어 일행과 같이 움직이기로 했던 터였다.

퇴근 러시아워가 시작되는 시간이어서였는지 팔달로는 밀리고 있었다. 전주의 남문인 풍남문을 한바퀴 빙돌아 경기전에서 내렸다.

풍남문은 전주의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98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창건했다고 하며 풍남문(祮南門)이란 편액은 서기순 감사가 쓴 것이라 한다. 풍남이란 이름을 명명한 유래에 대해서는 이를 중건한 조선 후기 영조 때에 중국 한고조 유방의 향리(鄕里)명「풍패(豊沛)」를 따서 남문은 풍자를 머릿글자로 하고 서문은 패를 머릿글자로 해서「풍남」,「패서」라 불렀다고 한다.

1905년 조선 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전주부성 4대문 중 풍남문만 제외한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었다. 풍남문은 동학 혁명군이 전주에 진격하여 이곳에 집강소를 설치하기도 한 곳이며,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이 순교한 뒤, 그의 목을 풍남문의 누각에 매달아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기도 한 곳이다. 1980년 종각과 포루, 풍남문 바깥 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풍남문은 주변의 그만그만한 상가 건물에 둘러싸여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기에, 일부러 찾지 않으면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항상 안타깝다.

전주의 상징 풍남문

경기전 맞은 편에 한국 최초의 순교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피를 흘린 형장자리에 세운 전동성당이 있다. 원래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있던 자리이며, 천주교 신자의 순교지이기도 한 이 곳에 1889년 프랑스의 보드네(한자명 尹沙物)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V.L.프와넬(한자명 朴道行) 신부의 설계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성당 건물의 기초는 풍남문의 성을 헐은 돌을 구입하여 쌓았다. 화강석을 기단(基壇)으로 사용한 붉은벽돌 건물로서, 본당과 측랑(側廊)의 평면 구성에다 내부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준다. 종머리는 로마네스크의 주조(主調)에 비잔틴풍(風)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성당 건물의 기초는 풍남문의 성을 헐은 돌을 구입하여 쌓았다. 화강석을 기단(基壇)으로 사용한 붉은벽돌 건물로서, 본당과 측랑(側廊)의 평면 구성에다 내부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준다. 종머리는 로마네스크의 주조(主調)에 비잔틴풍(風)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 비잔틴 풍에 로마네스크 양식이 가미된 전동성당은 그 자체로도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이 영화촬영에도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 바다를 이루게 했던 영화 <약속>의 두 주인공 박신양과 전도연이 결혼식을 한 곳이다. 또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전동성당 여기저기서 날아다니는 가운데, 신랑 신부의 웨딩 사진촬영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불행히 1988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다.
원래 일정에는 풍남문과 전동성당 탐방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시간관계로 멀리서 건물만 구경하고 경기전으로 바로 들어간 것이 아쉽다. 하지만 자주 찾아가 본 곳이기에 지금도 친숙한 느낌이 든다.

전동성당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하마비,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을 거쳐 들어가면 영정을 봉안한 다포식 맞배지붕의 전각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본전이다.

본전에는 태조의 영정과 함께 어진을 옮기거나 봉안할 때 사용했던 신연(神輦)이라는 가마와 향로를 옮기던 향정(香亭)이라는 가마, 왕이나 고관의 행차시에 사람이 타고가던 가교(駕轎), 옥교(玉轎)라는 가마를 볼 수 있다. 또 내삼문에서 전각을 바라보면 지붕에 두 마리의 거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태조와 그 후손들의 영생과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것이라 한다.

태조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
태조 이성계의 영정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옛날 의상과 소품들을 들고, '명성황후' 드라마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 드라마 촬영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했다.

홍살문에서 외삼문까지 들어가는 동안 바람에 날려 떨어진 낙엽을 밟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가을의 정취였다.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이곳 저곳을 구경한 후 전각 오른쪽 보도를 따라 문으로 들어가니 전주사고가 나왔다.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곳이다. 울창한 대나무 숲과 넓은 정원이 잘 어울리는 이곳에는 마당 한가운데에 '조선왕조실록보전기념비'와 석등이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는 건물이 바로 전주사고이다. 전주사고는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 그리고 성주사고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세종 때 설치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와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고,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내장산으로 옮겨져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주사고는 그 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이 소실된 것을 1991년에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실록각의 2층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아래층은 통풍을 고려해

전주사고

기둥만 세워 습기를 방지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들어올 때 보았던 울창한 대나무 숲은 두 가지 의미로 심어졌다고 한다. 하나는 대나무의 곧고 바른 성품처럼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항상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다른 하나는 대나무의 늘 푸른 성품처럼 왕과 그 후손의 영원한 번창함을 기원한다는 것이다.

전주사고를 나와 조경묘로 향했다. 조경묘는 경기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과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이한공은 이 태조의 21대조로 신라사공 벼슬에 올랐다. 시조비는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대손 군윤 김은의의 딸이라 전한다. 시조와 시조비의 두 위패는 영조가 친필로 써서 보낸 것이라고 한다. 평상시에는 이곳의 문이 잠겨있어 안을 볼 수 없는데, 선생님들을 위해 특별히 개방했다고 안내인은 애써 강조한다.


우리는 가끔 조경묘와 조경단
1)을 혼동한다. 조경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전주 이씨의 시조와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고, 조경단은 전주시 덕진구 덕진시민공원 내 건지산 줄기에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 시조 이한의 묘소와 제단을 말한다. 둘 다 전주가 왕조 전주 이씨의 발상지라는 의의를 갖는다는 공통점을 갖기에 혼동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경묘는 사당이고, 조경단은 묘소임을 기억하면 쉽게 구별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나중에라도 시간이 나면 조경단에 한번 가볼 생각이다.

조경묘(시조의 사당)
조경단(시조의 묘소)

(註1 : 조경단에는 1만여 평의 경내에 주변을 돌담으로 쌓고 동·서·남·북문을 두었다. 조경단 남쪽 20m 지점에는 고종이 세운 비석이 비각에 안치되어 있다. 거북등 위에 세워진 비석은 너비 1.8m, 두께 0.3m, 높이 약 2m로 거대하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비석 앞면에 새겨진 '대한조경단'이라는 글씨와 비문은 고종의 어필이다. 비각은 정사각형 3칸 팔작지붕이다.)

우리 일행은 조경묘를 뒤로하고 예종대왕 태실과 비에 도착했다. 예종대왕 태실과 비는 원래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이곳 경기전 경내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태실은 한변의 길이가 170㎝의 팔각형 석난간 내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부도형 돌을 얹은 다음 옥개석을 덮었다.

태실비는 예종대왕 태실과 함께 옮겨진 것으로 비석 전면에는 '예종대왕태실'의 6자가 해서체로 음각되었고, 후면에는 '만력 육년 시월 초이일건' 이라 하고 그 밑에 2행으로 '후일백 오십 육년 갑인 팔월 이십육일 개석입'(1734)이라 새겼다. 이 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이수에는 용을 조각하였다.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태실이 있었던 곳은 신성한 곳으로 모두 명당자리라고 하며, 일제의 만행으로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없어졌는데, 예종대왕의 태실은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전에 왔을 때는 아무 생각없이 스치고 지나갔는데, 이번에 설명을 듣고 자세히 둘러보니 유홍준 교수가 말한 것처럼 '아는 만큼 느낀다'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예종대왕 태실과 비

인솔하시는 선생님께서 빨리 강암 서예관으로 가야한다며 시간이 없다고 난리다. 일행은 잰걸음으로 경기전 남쪽 전주 천변에 위치한 서예관으로 향했다. 강암 서예관은 서예작품을 전시하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서예 전문 전시관이라 한다. 강암 송성용 선생께서 평생 모아오신 작품과 땅을 전주시에 내놓아 세워진 서예관에는 강암선생의 작품은 물론이고,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창암 이삼만, 다산 정약용, 송재 송일중, 유재 송기면 선생 등 우리나라 서예역사에서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유명한 분들의 작품(1,000점)을 보관하여 전시하고 있다. 사실 서예에 관한 한 문외한인 내가 이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흰색의 화선지에 그려진 매화, 난, 국화, 대나무 등의 사군자 그림과 눈 쌓인 마을의 산수화 등을 보고 나니 벌써 겨울이 시작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강암선생의 일화 중에 그날그날 쓸 만큼만 먹을 직접 갈아 붓글씨를 쓰셨다는 여유로운 마음, 손님이 찾아오면 하시던 일을 멈추고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반드시 집 밖까지 배웅했다는 넉넉한 마음 등, 평상시 여유를 가지고 생활하셨다는 부분에서는 바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나로선 본받을 만한 점이 많았다. 강암선생은 가고(1999년 2월) 없지만, 서예관과 작품은 남아 바쁜 현대인들에게 말한다. '여유와 넉넉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라' 고.

강암 서예관에서 나오니 벌써 어둑해졌다. 5시 30분 경 학교 버스에 올랐다. 이제 전북대 삼성문화회관 처음 출발지로 돌아간다. 짧은 시간(1시간 30분 정도)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시간이었다.

무심코 지나쳤던 경기전 주변에 그렇게 많은 문화 유적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풍남문, 전동성당, 전주사고, 조경묘, 강암 서예관, 오목대와 이목대2), 한벽당3)까지 다 둘러본다면 반나절은 족히 걸려야할 탐방장소였음을 알았다. 사실 돌아오는 길에 오목대와 이목대를 한번 더 둘러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음에 방문할 때는 꼭 오목대와 이목대도 같이 탐방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서운한 마음을 접었다.
(註2 : 오목대는 1380년 삼도 순찰사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이며,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목조 이안사의 유허로서 시조 이한 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경기전의 남동쪽 500m쯤 떨어진 곳,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는데, 옛날에는 동쪽의 승암산에서 오목대까지 산이 이어져 있었으나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맥이 끊겼고, 지금은 전주-남원간 4차선 도로가 나있다. 오목대에서 육교 건너편으로 70m쯤 위쪽으로 가면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註3 :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서 옛사람은 한벽 청연이라 하여 전주 팔경의 하나로 꼽았으며, 그 서쪽 일대는 자만동 또는 옥류동이라 불리었다. 이곳은 우리 고장 뿐만 아니라 호남의 명승으로 알려져서 시인 묵객들이 그칠새 없이 찾아드는 곳으로 시가 많이 전해오고 호남읍지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김진상 등 19명의 저명한 인사들의 시문이 담겨 있어 그 시절의 풍류를 살필 수 있다. 한벽당이라 처음 불리게 된 연대는 확실히 밝혀 낼 수 없고 월당 선생 유허비에는 월당루라 비쳤다. 당초에는 월당루로 불리운 것 같은데 한벽이란 어귀는 벽옥한류란 글귀에서 따낸 것으로 뭇사람이 붙인 것 같다. 지금은 철길이 있었던 자리에 전주 남원간 4차선 큰도로가 뚫려 시끄러운 차소리만 들려 오는 외로운 모습만 보이고 있다.)

강암 서예관
오목대
이목대
한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