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October 3, 2013

전주 이씨의 유래


전주 이씨의 유래.


옛지명에 전주가 완산이었고 완산이씨가 전주이씨로 바뀌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전주의 지명유래는 마한의 원산성에서 유래합니다.
, () ''의 차음(借音)이어서 백제 때에는 완산(完山)이라 불렸으며,
통일신라시대인 756(경덕왕 15) '()'을 의역하여서
전주(全州)라고 고처지게 됩니다.

이씨 족보관련 글들을 읽다가 우연히 알게된 사실인데 전주이씨의
유래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이것을 밝히는 것도 역사의 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아래의 글은 전주이씨에 관련해서 어느분이 올려놓은 글을 퍼온겁니다..

읽어 보시고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全州 李씨의 유래

우리 나라의 이씨는 한국 자생(自生)의 이씨와 외국에서 귀화한 외래(外來)의 이씨로 나눌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처음에 성이 없다가 통치자, 곧 귀족부터 성이 있게 되었는데, 문자가 없었으므로 자연 중국 한자(漢字)로 표기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이씨는 본관이 237본이나 된다. 이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성은 경주이씨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 이며, 월남에서 귀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그러면 현재 24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우리 全州李씨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여기에는 현재까지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두 가지 설 모두 그 근거가 모호하여 우리 全州李씨의 정확한 생성유래로서 여러 종현 종친들의 단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中國)에서의 귀화설(歸化說)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우리 시조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우리 시조 사공 공의 휘는 한()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 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全州李씨가 본래 중국 당()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경주이씨(慶州李氏)로부터의 분적설(分籍說)

경주이씨는 신라 육성(六姓 : · · · · · )의 하나로 우리 나라 이씨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씨족이다.

<
경주이씨대동보> 총론편을 보면 경주이씨의 유래가 나온다. 자못 전설적이지만 신라 六성의 시조 6명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곧 육인천강설(六人天降說)이다. 경주이씨의 시조 알평(謁平)은 처음에 하늘로부터 박바위[瓢岩]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곳은 육촌(六村)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인데 나중에 급량부(及梁部)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다. 서기 기원전 69(前漢 宣帝 地節 元) 3월 초하루에, 6촌장이 알천(閼川)의 바위 위에 모여 양산(陽山) 아래를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번개 빛 같고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양이 보여, 찾아가 보니 검붉은 알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슬피 울며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래서 6촌장이 그 알을 깨 보니 한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모두들 이상히 여겨 그 아이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불렀다. 이 혁거세가 13세가 되자 기원전 57(前漢 宣帝 五鳳 元)에 이를 왕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라를 건국한 공로로 알평은 아찬(阿餐)의 벼슬에 오르고 기원전 32(新羅 儒理王 8)에 이씨(李氏)를 사성(賜姓)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알평(李謁平)이 경주이씨의 시조가 되는데, 과거의 <경주이씨족보>에는 이알평의 먼 후손 이거명(李居明 : 蘇判公)을 중시조 1()로 삼아 계대수(系代數)를 따져 왔다. 그래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는 몇 대가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근 2백년 전 조선 말기 무렵에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의 대수(代數)와 이름이 나타나 36대의 명단을 찾아냈다고 한다.

(1
)알평(謁平)- (2) - (3) - (4)중가 - (5) - (6)문상- (7) - (8)수장 - (9) - (10)기정 - (11)미선 - (12)성립 -(13) - (14)계환 - (15) - (16)선장 - (17)기담 - (18)인흥 - (19) - (20)선정 - (21) - (22)태휘 - (23)우영 - (24) - (25) - (26)경지 - (27) - (28)원장 - (29)한로 - (30)계탕 -(31) - (32)사언
- (33)
→ (34)희두 - (35) - (36)거명
↘ (34)
진두 - (35)백전 →(36)
↘(36
) ()

위에서 보면 시조 이알평부터 36세손 이거명까지의 계통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이거명을 중시조 1()로 따져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 全州李씨와의 문제는 바로 34세 희두(禧斗)의 동생 진두(辰斗)와 그의 둘째 손자인 한()이 관계되는 것이다. 여기서 34세 진두씨의 약력에 나와있는 기록을 보면
"
공도 문장가로서 경문왕 때 임오년에 형 시중공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랑평 장사내사상병부령에까지 이르렀다. <세장보(世藏譜)>를 참고 하건대 이분의 손자 한()이 完山 李씨의 시조가 되었다더라." 이 기록에 의하여 이진두의 둘째 손자 한이 바로 우리 全州李씨의 시조 사공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상서공파세보(尙書公派世譜)>에는
(34
)진두(辰斗)-(35)백전(白全)-(36) ()-(37) ()으로 세계(世系)를 꾸며 놓고 이한(李翰)의 약력에 "대사공 은상서 어사중승 상상주국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 김은의의 딸이다. 全州李씨의 시조다" 라고 적어 놓았다. 여기서도 한()이 全州李씨의 시조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경주이씨 족보와 다른 점은 공()과 한()을 형제가 아닌 부자 사이로 바꾸어 놓은 것이 이상한 점이다.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으로 경주이씨 족보에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은 원주이씨(原州李氏) · 재령이씨(載寧李氏) · 아산이씨(牙山李氏) · 우계이씨(羽溪李氏) 등이 있다. 이 성들은 분적(分籍)된 기록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全州李씨가 경주이씨에게서 갈라져 나갔다는 기록은 위에서와 같이 매우 애매하고, 또 그 기록이 한()씨의 약력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조부의 약력에 기재되어 있는 점이 더욱 이상하다.

이상으로 볼 때, 우리 全州李씨가 중국에서 왔다, 또는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 애매 모호하다.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은 아마도 옛날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야사적(野史的) 기록이라 세직(世稷 : 世直)의 세()자가 당나라 태종 리세민(李世民)과 같은 항렬자로 본 것이다. 또 경주이씨에게서 왔다는 기록은 경주이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니까 혹시 갈라져 온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경주이씨는 현재 이알평 시조로부터 오늘날 75() ()자 항렬까지 2천여년의 역사를 가졌고, 경주이씨의 중시조 이거명(李居明)과 전주이씨의 이한(李翰)은 동항렬(同行列)이므로 이분이 우리의 시조라면 연대는 비슷하리라 본다. 그러나 기록이 분명치 않으니 우리의 시조 신라 사공(司空) () 할아버님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단언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규명될 수 있는 후일을 기약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전주리씨에서 갈라져 나간 대흥이씨(大興李氏) 영해이씨(寧海李氏) 등도 있음을 첨언한다.

全州 본관의 유래
현재의 전라북도 도청 소재지인 전주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 : 比斯我·比自火)으로 서기 554(백제 위덕왕 1) 완산州라 하였다가 565년에 州를 폐하였다.

백제가 신라에 망한 뒤 685(신라 신문왕 5)에 州를 다시 두어 완산주라 하였다가 757(경덕왕 16)에 지금의 全州로 개칭하였다. 그 후 효공왕때 견훤(甄萱)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936
(고려 태조 19)에 후백제의 신검(神劍, 견훤의 아들)을 쳐서 평정한 후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일컬었다가 940(태조 23)에는 다시 全州로 환원하였다. 993(고려 성종 12)에는 그 고을을 맡은 벼슬 이름을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일컫고, 995(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순의군(順義軍)이라 칭하고 강남도(江南道)에 예속하였다.

1018
(고려 현종9)에 이르러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라는 이름으로 고을의 지위를 올렸다가 그후에 또 전주목(全州牧)으로 개칭하였다. 1355(공민왕 4)에는 원나라의 사신 야사불화(야思不花)를 거두었던 곳이라 하여 그 지위를 낮추어 부곡(部谷)이 되었다가 1년뒤인 1356(공민왕 5)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우리 태조 고황제 원년(1392)에 임금님 조상이 나신 고장이라 하여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격을 올렸고 1403(태종 3)에 전주로 다시 고쳐 부윤(府尹)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진()을 두기도 하였다. 그 뒤 줄곧 전라도의 감영이 이곳에 소재하였으며, 1895(고종 32) 郡이 되고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 전라북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그 뒤 1935년 府로 승격되었다가 1949년 市로 개칭되어 오늘날 인구 50만의 도시가 되었다.

完山은 원래 전주부의 남쪽 3리쯤에 있는 작은 산 이름으로 고덕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였다. 또 북쪽 10리쯤에 있으면서 마이산(馬耳山)으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전주의 진산(鎭山)인 건지산(乾止山)과 마주 바라보던 산이었다.

따라서 우리 전주이씨는 완산이씨(完山李氏)라고도 불렀으며, 현재도 기호에 따라 간혹 "완산"을 본관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全州를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조선왕조 시대의 옛 문헌들에서도 일관되게 "전주"를 본관으로 사용하여 왔던 사실로 보아 조선 건국과 함께 "전주"본관 사용이 정착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무튼 全州는 조선왕조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며 시조 사공 공(휘 翰)의 묘역인 "조경단(肇慶壇)이 위치(전주시 덕진동 건지산)하고 있는 곳으로 우리 전주이씨와 절대적인 관계에 있다.

시조이래 대대로 전주를 세거지로 살아왔던 우리 선조들께서는 태조 고황제의 고조부인 목조(휘 안사"安社")부터 관향인 전주를 떠나 강원도 삼척(활기동) → 함경도 덕원원나라 와똥(斡東) → 적도(두만강 유역) → 함경도 경원 등으로 이거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 지역을 토대로 고려말 명장으로 성장한 태조 고황제(휘 성계"成桂")께서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통하여 국운이 쇠한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

http://www.coo2.net/bbs/skin/nzeo_ver3/t.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