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에 관한 나의신앙관
미국 사람이 무엇이 아쉬어서 종중일에 관섭 하느냐
내가 어려서 부터 집을 나올 떼 까지
밥상머리 에서 효도 학을 메일 귀가 달토록 아버지로 부터 들었고 제사 모시는겄이 조상에 대한 효도라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부모
살아생전에 효도 한번 못 해보고 도라가신
후에도 이 불효를 면 해보려고 노력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미국놈이 종중일에 간섭 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손들에게 이 효 사상을 강조 하신 배경을 설명
고저 한다.
선친의 소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시다가 일제 학교 선생이 순사복을 입고서 칼을 차고 서당소년들을 잡아다가 머리를 깎이고 일제교육을 시키는 시대에 선친도 잡혀서 머리를 깎이고 임피소학교을 4년제 소학교를 3년에 마치시고 관비로 전주농업학교을 마치신후 전남 각 오지로 군청 산림계로 발령이 나서 진도, 완도, 장성 (큰누나 출생), 그리고 나의 출생지는 광양 등으로 전전 하시였든 것으로 들었다.
내 가 생후100일이 지나서 관직을 그만두시고 전남 광양에서 현 고향으로 돌아오신 이유는 일제 강점기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우고 조선의 토지을 수탈고저 1912 년대 에 총독부 게시판 에 각자소유 토지을 등록 하도록 총독부게시판에 공고를 했었는데 그 당시 사정으로는 시골에서 신문 보는 사람도 거의 없을 때인데 어떻게 그 소식을 안자는 남의 땅을 자기 앞으로 등록 하면 자기 땅이 되는 세상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안골에 대종중 선산 옆에 채 씨네 선산이 나란히 있었는데 이 채 씨들이 우리선산을 채 씨네 땅으로 등록이 되었으니 우리종중 에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한다. 재판을 걸어서 찾아야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당시 신학문을 한사람은 문중에서 우리 아버지 밖에 없었든 형편이라서 종중에서 소환 령이 내려져서 관직 을 사직 하시고 귀향 하여서 재판해서 안골 선산을 찾았다고 아버지로부터 직접 나에게 전해주셨다. 그 이후 아버지께서는 종중일 하고 창오학교일에 전념하시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큰집에 제사 모실 때는 4 형제 중에 유독 나만을 꼭 데리고 다니셨고 내가 잠들면 어머니 아버지 등에 엎여서 집에 오 곤 한 기억이 난다. 내가 군중 1학년 때 (1946넌) 안골 대종중 시향때 따라 갔는데 중학교 교복을 입고 시향에 참여 한 첫 예가 아닌가싶다. 그때 나한테 관심을 보여주신 분이 지금 생각 하니 지경 오살리 희생씨 (준효부) 가 음복녜 하면 대추, 곶감 등 집어주고 이름 나이 등을 무러 봐주면서 이뻐 해즌 기억 이 난다.
내가 미국 오기 2~3년 전으로 62~3년으로 기억 되는데 아버지께서 올라 오셔서 공구형님과 파주를 갔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시골와 다를겄이 없었고 서울에서 양복쟁이들이 오니 대우가 극진 했었다. 족보를 보니 益安大君配 貞慶翁主崔氏之墓 가 坡州郡 泉峴面 三坊里 리로 되여 있는데 지금은 다 도시화 되어서 옛 모습을 찾지 못할겄으로 안다.
내가 97년도에 건일재약 연구소장직을 제안 받아서 나오게 되였는데 증조부 기일을 택 해서 시향 모신다고 기별이 왔는데 주중에 시향을 모신다니 주말로 해야 나갈 수 있다고 해도 음 2월7일을 이면 양력 3월초 가 되고 주중이라서 곤란 하다고 해도 고집하시니 내려가지 못 했었다. 그러다가 주말이 되여서 네려 갔드니 딴 사람을 몰라도 혁구 너는 꼭 참여 할줄 알았는데 서운하셨다는 원망조로 말씀 하셔서 . 사적일로 약 이틀씩이나 결근 하면 연구소를 막 시작 하는데 전연구원이 일이 안 됩니다. 직업 윤리상 안 됩니다. 제 직업윤리가 보통 윤리를 우선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4월 첫째
일요일로 정 하고 나서 안정이 되었엇다.
내가 오랜 미국 생활을 접고 1997년 8월에 귀국 해보니 앞산에 두형님 묘가 가매장 한 사태로 있어서 보기 민망해서 밤나무 산을 밀어버리고 아버지 어머니 묘 앞에 쓰자고 헤서 합의가 이루어졌었다. 하기전에 밤나무 산이 희빈 윤석 명의로 되여 있으니 전은종중 명의로 하기로 합의 가 이루저서 일이 끝나니 생각이 달라 진겄이다 어떤 영문인지 묘지만 전은종중 명의로 해놓고 나머지 산은 그대로 놓아두고서 그 이유를 물으니 돈을 나더러 내 라는겄이다.
윤석이가 형편이 어려우니 나더러 아파트 전세 (8000 만원) 을 요구 하길레 내가 너희들의 호구냐 형편이 어려우면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한 테 이야기 해야지 선산을 팔아서 교회 받치겠다는 겻이냐고 야단을 치니 얼마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고 합의대로 밤나무산은 종중 명의로 되였는데 결과 적으로는 과수원 토지 보상금 3000 만원 상당을 횡령 해버리고 과수원 자리를 무단 점유 한 것이다.
2005 년에 소희재 개관이 되였는데 소희재 전야에 전은자손들이 모여서 총회를 하기로 하고 모였는데 회의를 주재해할 대표가 술쳐먹고 깽판을 치고 지금껏 한 번도 회의를 진행을 못 했고 지금껏 이르렀다. 그래서 전은종중 규약을 만들어서 사인을 하라고 했더니 안 해서 등기 우편으로 보내서 사인은 했는데 종중 규약을 만들어서 얽매니 화가 난 모양이다 미국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종중일 에 간섭 하느냐고 폭언하기 이르렀다.
저의들이 잘 하면 칭찬뿐이겠나 업고 다니지! 잘 한갓은 친찬 안 해주고 못 한갓만 야단친다고 잘 못 했으면 고쳐나가면 되는데 사과 했으니 끝이다 이거지, 공금횡령죄 로 형사고발 까지 생각 했는데 극구 말려서 그만두었다. 잘 못 했으면 죄 의식 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없고 뻔뻔한지 조상 제사장 에서 축문 읽고 제사를 지낼 면목이 있는지?
이글을 올리는데 내심정은 읍참마속 하는 심정으로 쓰고 있으니 양해 해주기 바란다. ((泣斬馬謖)은 '울면서 마속의 목을 쳤다'는 으로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사정(私情)을 물리쳐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또한
전은종중 규약에 회원 자격을 “ 전은자손 으로서 만 18세 이상의 남녀로서 소희재 시향에 참여한자” 규정 되여있어서 윤석 이는 전은종중 에 회원 자격도 없다. 소희재 주변 포장 에 관하여 기술 하겠는데 공자로 포장 해주기로 돼서 하려고 하니 윤석이 가 어떻게 알고 와서 누구 맘대로 남의 땅에 손을 대느냐고 깽판 쳐서 못 한겻을 들어서 나도 알게 되였다 이런 사실 와 선산을 팔아먹겠다고 한일들을 은퇴한 원로 목사는 맛나서 상의 하니 이 목사 왈 “ 목사이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하세요” 참으로 명언을 나에게 해주시었다.
소희제 주변 포장을 못 해서 결국 3000 만원 살당의 재산 피해를 보았는데 부끄러운 일이니 덥고 넘어가야 되는지?. 왜 윤석이 안테 피해보상을 요구 못 하는 지?
이런 패윤아적인 윤석 목사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느냐? 생각 끝에 벌칙 조항에 파문 이라는 조항을 집어넣었는데 파문 이라는 정의는 종교단체에서
축출을 의미 하는데 윤석 이는 소희재 시작해서 얼굴 한번 비쳐본 적이 없든 애가 눈먼 돈이 종중에 들어오면 나도 자손이라고 내 돈 내놓으시오 할
것 틀림없이 보인다. 그래서 악의 씨앗은 잘라내야 되는데 하는
방법은 산남종중 자손으로서 자격을 박탈하고 족보 애서 삭제 하는 방법 박에
없다고 생각 한다. 이미 내봉 아저씨 의 경우 가
본보기가 될 겄이다.
이번 총회때 산남종중 규악을 심의 할때 심도 있는 논의를제안 한다
**. 내가 이글을 올릴여고 장시간 고민 끝에 읍참마속 하는 심정으로 이글을 올리나니 한 노인의 노망 이라고 치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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