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0, 2012

전주이씨 시조 의묘 - 조경단 [肇慶壇]

조경단 [肇慶壇]

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myblog.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line.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kin.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line.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objection.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line.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print.gif

http://static.naver.com/100/images/icon_sum.gif요약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있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의 묘소.

지정종목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전북기념물 제3

지정일

1973 06 23

소재지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산 28 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mapView.gif

크기

면적 30,248





1973 6 23일 전라북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덕진시민공원 내 건지산(乾止山) 줄기에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한은 조선 태조 21대조로, 태조는 묘역을 각별히 수호하도록 하였으며 이후의 역대 왕들도 정성을 다하여 보호하였다.

특히 고종은 1899(광무 3) 5월에 이곳에 단을 쌓아 당상관을 배치하고 비석을 세워 전주이씨 시조의 묘로 정하고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해마다 한 차례 제사를 지내고, 단을 중심으로 450정보의 단역을 마련하였다.

이는 경기전, 조경묘와 함께 전주가 왕조 전주이씨의 발상지라는 의의를 한층 현실화한 조치였다. 전주이씨 선원계보에 따르면, 신라시대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을 시조로 18대인 목조까지 전주에 기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태조 22).

1만여 평의 경내에 주변을 돌담으로 쌓고 동·서·남·북문을 두었다. 조경단 남쪽 20m 지점에는 고종이 세운 비석이 비각에 안치되어 있다. 거북등 위에 세워진 비석은 너비 1.8m, 두께 0.3m, 높이 약 2m로 거대하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비석 앞면에 새겨진 ‘대한조경단’이라는 글씨와 비문은 고종의 어필이다. 비각은 한 변이 7.2m 정사각형 3 팔작지붕이다.


http://static.naver.com/100/images/icon_con.gif

전주이씨 의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myblog.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line.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kin.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line.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objection.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line.gifhttp://static.naver.com/100/images/btn_print.gif

http://static.naver.com/100/images/icon_sum.gif요약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豊南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각.



소재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 102




경기전 본전 /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곳으로 주변에는 조선시대 왕들의 초상화가 있다.

1991 1 9 사적 제339로 지정되었다. 1410(태종 11)에 임금은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御容殿)이라 하였다. 경기전은 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주에 세운 전각으로, 세종 때 붙인 이름이다.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14(광해군6)에 중건하였다. 보호면적은 49,590㎡이다.

경기전의 경역은 정전(正殿) 조경묘(肇慶廟)로 나뉜다.

정전(보물 1578)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보물 931)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 측면 3칸 규모이다.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 및 갑석(甲石)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다포계(多包系) 형식의 맞배집으로,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添閣) 세워 배례청을 시설했다. 마치 능침(陵寢) 정자각(丁字閣)과 같은 형상이다. 이 첨각 기단의 3면에 벽돌을 깐 보도를 연결하였다.

조경묘는 정전 북쪽에 있다. 태조의 22대조이며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1771(영조 47)에 지은 것이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경기전 조경묘 도형의 그림을 보면 지금은 없어진 전사청(典祀廳) ·동재 ·서재 ·수복방 ·제기고 등 부속건물들과 별전이 따로 있는 광범위한 성역이었다. 전주시가 관리하고 있다.


전주 경기전

◆ 전주 경기전 일원 - 2001년 11월 16일(금) 전주문화탐방 ◐ 날씨 - 맑음

16:00

- 출발(전북대 삼성문화회관)

16:15

- 풍남문 전동성당 경유 경기전 도착

17:00

- 경기전 출발 → 강암 서예관으로

17:30

- 강암 서예관 출발 →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으로

◆ 여 행 록


경기전은 전주 이씨만의 유산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나는 이번 문화탐방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위와 같은 명쾌한 생각을 갖지 못했었다. 경기전, 조경묘, 조경단, 오목대, 이목대 등의 유적지를 떠올리면 그저 전주 이씨와 관련있는 문화재로만 치부해버리곤 했다. 하지만 2001년 11월의 가을 문턱에서 우연히 갖게된 짧은 시간의 전주 문화유산 탐방은 그 동안 막연히 가졌던 나의 오만한 편견을 치유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번 탐방을 통하여, 예전에 서너 번 경기전을 아무런 느낌없이 휘둘러보고 나오며,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있는 곳' 이라고만 단순히 느꼈던 나의 무지함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11월 16일 오후 4시경, 전북사대부고 주최로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서 열린 교실 수업 개선 워크숍 일정을 끝내고, 문화탐방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문화탐방지역이 평상시 그다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곳이었기에, 사실 별 흥이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심 마지막 늦가을의 정취를 혹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버릴 수 없어 일행과 같이 움직이기로 했던 터였다.

퇴근 러시아워가 시작되는 시간이어서였는지 팔달로는 밀리고 있었다. 전주의 남문인 풍남문을 한바퀴 빙돌아 경기전에서 내렸다.

풍남문은 전주의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98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창건했다고 하며 풍남문(祮南門)이란 편액은 서기순 감사가 쓴 것이라 한다. 풍남이란 이름을 명명한 유래에 대해서는 이를 중건한 조선 후기 영조 때에 중국 한고조 유방의 향리(鄕里)명「풍패(豊沛)」를 따서 남문은 풍자를 머릿글자로 하고 서문은 패를 머릿글자로 해서「풍남」,「패서」라 불렀다고 한다.

1905년 조선 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전주부성 4대문 중 풍남문만 제외한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었다. 풍남문은 동학 혁명군이 전주에 진격하여 이곳에 집강소를 설치하기도 한 곳이며,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이 순교한 뒤, 그의 목을 풍남문의 누각에 매달아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기도 한 곳이다. 1980년 종각과 포루, 풍남문 바깥 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풍남문은 주변의 그만그만한 상가 건물에 둘러싸여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기에, 일부러 찾지 않으면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항상 안타깝다.

전주의 상징 풍남문

경기전 맞은 편에 한국 최초의 순교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피를 흘린 형장자리에 세운 전동성당이 있다. 원래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있던 자리이며, 천주교 신자의 순교지이기도 한 이 곳에 1889년 프랑스의 보드네(한자명 尹沙物)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V.L.프와넬(한자명 朴道行) 신부의 설계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성당 건물의 기초는 풍남문의 성을 헐은 돌을 구입하여 쌓았다. 화강석을 기단(基壇)으로 사용한 붉은벽돌 건물로서, 본당과 측랑(側廊)의 평면 구성에다 내부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준다. 종머리는 로마네스크의 주조(主調)에 비잔틴풍(風)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성당 건물의 기초는 풍남문의 성을 헐은 돌을 구입하여 쌓았다. 화강석을 기단(基壇)으로 사용한 붉은벽돌 건물로서, 본당과 측랑(側廊)의 평면 구성에다 내부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준다. 종머리는 로마네스크의 주조(主調)에 비잔틴풍(風)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 비잔틴 풍에 로마네스크 양식이 가미된 전동성당은 그 자체로도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이 영화촬영에도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 바다를 이루게 했던 영화 <약속>의 두 주인공 박신양과 전도연이 결혼식을 한 곳이다. 또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전동성당 여기저기서 날아다니는 가운데, 신랑 신부의 웨딩 사진촬영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불행히 1988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다.
원래 일정에는 풍남문과 전동성당 탐방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시간관계로 멀리서 건물만 구경하고 경기전으로 바로 들어간 것이 아쉽다. 하지만 자주 찾아가 본 곳이기에 지금도 친숙한 느낌이 든다.

전동성당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하마비,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을 거쳐 들어가면 영정을 봉안한 다포식 맞배지붕의 전각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본전이다.

본전에는 태조의 영정과 함께 어진을 옮기거나 봉안할 때 사용했던 신연(神輦)이라는 가마와 향로를 옮기던 향정(香亭)이라는 가마, 왕이나 고관의 행차시에 사람이 타고가던 가교(駕轎), 옥교(玉轎)라는 가마를 볼 수 있다. 또 내삼문에서 전각을 바라보면 지붕에 두 마리의 거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태조와 그 후손들의 영생과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것이라 한다.

태조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
태조 이성계의 영정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옛날 의상과 소품들을 들고, '명성황후' 드라마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 드라마 촬영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했다.

홍살문에서 외삼문까지 들어가는 동안 바람에 날려 떨어진 낙엽을 밟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가을의 정취였다.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이곳 저곳을 구경한 후 전각 오른쪽 보도를 따라 문으로 들어가니 전주사고가 나왔다.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곳이다. 울창한 대나무 숲과 넓은 정원이 잘 어울리는 이곳에는 마당 한가운데에 '조선왕조실록보전기념비'와 석등이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는 건물이 바로 전주사고이다. 전주사고는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 그리고 성주사고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세종 때 설치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와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고,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내장산으로 옮겨져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주사고는 그 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이 소실된 것을 1991년에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실록각의 2층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아래층은 통풍을 고려해

전주사고

기둥만 세워 습기를 방지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들어올 때 보았던 울창한 대나무 숲은 두 가지 의미로 심어졌다고 한다. 하나는 대나무의 곧고 바른 성품처럼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항상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다른 하나는 대나무의 늘 푸른 성품처럼 왕과 그 후손의 영원한 번창함을 기원한다는 것이다.

전주사고를 나와 조경묘로 향했다. 조경묘는 경기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과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이한공은 이 태조의 21대조로 신라사공 벼슬에 올랐다. 시조비는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대손 군윤 김은의의 딸이라 전한다. 시조와 시조비의 두 위패는 영조가 친필로 써서 보낸 것이라고 한다. 평상시에는 이곳의 문이 잠겨있어 안을 볼 수 없는데, 선생님들을 위해 특별히 개방했다고 안내인은 애써 강조한다.


우리는 가끔 조경묘와 조경단
1)을 혼동한다. 조경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전주 이씨의 시조와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고, 조경단은 전주시 덕진구 덕진시민공원 내 건지산 줄기에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 시조 이한의 묘소와 제단을 말한다. 둘 다 전주가 왕조 전주 이씨의 발상지라는 의의를 갖는다는 공통점을 갖기에 혼동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경묘는 사당이고, 조경단은 묘소임을 기억하면 쉽게 구별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나중에라도 시간이 나면 조경단에 한번 가볼 생각이다.

조경묘(시조의 사당)
조경단(시조의 묘소)

(註1 : 조경단에는 1만여 평의 경내에 주변을 돌담으로 쌓고 동·서·남·북문을 두었다. 조경단 남쪽 20m 지점에는 고종이 세운 비석이 비각에 안치되어 있다. 거북등 위에 세워진 비석은 너비 1.8m, 두께 0.3m, 높이 약 2m로 거대하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비석 앞면에 새겨진 '대한조경단'이라는 글씨와 비문은 고종의 어필이다. 비각은 정사각형 3칸 팔작지붕이다.)

우리 일행은 조경묘를 뒤로하고 예종대왕 태실과 비에 도착했다. 예종대왕 태실과 비는 원래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이곳 경기전 경내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태실은 한변의 길이가 170㎝의 팔각형 석난간 내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부도형 돌을 얹은 다음 옥개석을 덮었다.

태실비는 예종대왕 태실과 함께 옮겨진 것으로 비석 전면에는 '예종대왕태실'의 6자가 해서체로 음각되었고, 후면에는 '만력 육년 시월 초이일건' 이라 하고 그 밑에 2행으로 '후일백 오십 육년 갑인 팔월 이십육일 개석입'(1734)이라 새겼다. 이 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이수에는 용을 조각하였다.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태실이 있었던 곳은 신성한 곳으로 모두 명당자리라고 하며, 일제의 만행으로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없어졌는데, 예종대왕의 태실은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전에 왔을 때는 아무 생각없이 스치고 지나갔는데, 이번에 설명을 듣고 자세히 둘러보니 유홍준 교수가 말한 것처럼 '아는 만큼 느낀다'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예종대왕 태실과 비

인솔하시는 선생님께서 빨리 강암 서예관으로 가야한다며 시간이 없다고 난리다. 일행은 잰걸음으로 경기전 남쪽 전주 천변에 위치한 서예관으로 향했다. 강암 서예관은 서예작품을 전시하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서예 전문 전시관이라 한다. 강암 송성용 선생께서 평생 모아오신 작품과 땅을 전주시에 내놓아 세워진 서예관에는 강암선생의 작품은 물론이고,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창암 이삼만, 다산 정약용, 송재 송일중, 유재 송기면 선생 등 우리나라 서예역사에서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유명한 분들의 작품(1,000점)을 보관하여 전시하고 있다. 사실 서예에 관한 한 문외한인 내가 이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흰색의 화선지에 그려진 매화, 난, 국화, 대나무 등의 사군자 그림과 눈 쌓인 마을의 산수화 등을 보고 나니 벌써 겨울이 시작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강암선생의 일화 중에 그날그날 쓸 만큼만 먹을 직접 갈아 붓글씨를 쓰셨다는 여유로운 마음, 손님이 찾아오면 하시던 일을 멈추고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반드시 집 밖까지 배웅했다는 넉넉한 마음 등, 평상시 여유를 가지고 생활하셨다는 부분에서는 바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나로선 본받을 만한 점이 많았다. 강암선생은 가고(1999년 2월) 없지만, 서예관과 작품은 남아 바쁜 현대인들에게 말한다. '여유와 넉넉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라' 고.

강암 서예관에서 나오니 벌써 어둑해졌다. 5시 30분 경 학교 버스에 올랐다. 이제 전북대 삼성문화회관 처음 출발지로 돌아간다. 짧은 시간(1시간 30분 정도)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시간이었다.

무심코 지나쳤던 경기전 주변에 그렇게 많은 문화 유적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풍남문, 전동성당, 전주사고, 조경묘, 강암 서예관, 오목대와 이목대2), 한벽당3)까지 다 둘러본다면 반나절은 족히 걸려야할 탐방장소였음을 알았다. 사실 돌아오는 길에 오목대와 이목대를 한번 더 둘러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음에 방문할 때는 꼭 오목대와 이목대도 같이 탐방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서운한 마음을 접었다.
(註2 : 오목대는 1380년 삼도 순찰사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이며,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목조 이안사의 유허로서 시조 이한 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경기전의 남동쪽 500m쯤 떨어진 곳,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는데, 옛날에는 동쪽의 승암산에서 오목대까지 산이 이어져 있었으나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맥이 끊겼고, 지금은 전주-남원간 4차선 도로가 나있다. 오목대에서 육교 건너편으로 70m쯤 위쪽으로 가면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註3 :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서 옛사람은 한벽 청연이라 하여 전주 팔경의 하나로 꼽았으며, 그 서쪽 일대는 자만동 또는 옥류동이라 불리었다. 이곳은 우리 고장 뿐만 아니라 호남의 명승으로 알려져서 시인 묵객들이 그칠새 없이 찾아드는 곳으로 시가 많이 전해오고 호남읍지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김진상 등 19명의 저명한 인사들의 시문이 담겨 있어 그 시절의 풍류를 살필 수 있다. 한벽당이라 처음 불리게 된 연대는 확실히 밝혀 낼 수 없고 월당 선생 유허비에는 월당루라 비쳤다. 당초에는 월당루로 불리운 것 같은데 한벽이란 어귀는 벽옥한류란 글귀에서 따낸 것으로 뭇사람이 붙인 것 같다. 지금은 철길이 있었던 자리에 전주 남원간 4차선 큰도로가 뚫려 시끄러운 차소리만 들려 오는 외로운 모습만 보이고 있다.)

강암 서예관
오목대
이목대
한벽당


Sunday, November 27, 2011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원래 노블리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브리제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노블리스 오블리제"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리스)만큼 의무(오블리제)를 다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로마 귀족의 절제된 행동과 납세의 의무를 다하는 모범적 생활은 평민들에게 귀감이 되어 국가천년을 지탱하는데 초석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국가에 사재를 헌납하고 솔선수범하여 전장에 나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 때 영국의 왕자 엔드류는 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죽을 수 있다는 지도층의 책임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 저명인사나 소위 상류계층의 병역기피, 뇌물수수 탈세 부동산 투기 등이 매우 오래된 병폐로 잔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조대왕 당시 흉년으로 인한 기근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던 제주도 사람들을 위해 전 재산으로 쌀을 사서 분배한 거상 김만덕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역사적 사례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우리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은 서양의 지도층 인사들의 행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 "노블리스 오블리제" 대신에 비슷한 뜻으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로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 바른 본을 보여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이루어 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지도층이 꾸정물을 만들어 내어 우리 사회를 온통 진흙탕 속을 만들어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과 재산이 많은 재력가들이 이제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나가야 할 때입니다. 권력은 누가 준것이며그 재산형성은 누가 가능케 한것입니까? 국민을 위해 겸손한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소비자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만큼 누리고 있으면 그만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영국의 왕자 앤드류, 조선시대의 김만덕 처럼 지도층의 인사들이 사회적, 국가적 의무를 다하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갈 때 선진국 대열에 들어 설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제사 지내기 문제 - 종교로 인한 제사 갈등

종교로 인한 제사 갈등

李 星 宰

미국 북가주분원장/공학박사

예수를 믿는 사람은 부모도 없니? 어떻게 조상님 제사를 안 모셔! 어릴 때 개신교를 믿는 친구에게 던진 말이다.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나보다 더 착하고 바르게 살 것이라는 나이브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거부하고 조상님 제사를 모시는 것을 비판하는 개신교 목사나 신자를 보면 정말 그들은 예수를 믿기 전에 가까이 있는 자신의 부모도 모르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교나 불교, 천도교 등은 말 할 것도 없지만 예수를 믿는 천주교 신자들도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제례형식과 절차가 서로 조금씩 다르겠지만 조상님을 공경하는 근본정신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을 것이다. 유난히 개신교 목사들은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를 비판하고 그로인해 신자들 집안에서는 제사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금년도 벌써 11, 머지않아 양력 음력 설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조상을 기리고 부모를 섬기는 미풍양속의 제사가 어디서부터 문제가 되었고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를 짚어보았다.

먼저 조상님의 넋을 기리는 미풍양속의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님을 알아야한다. 제사는 조상숭배와 효도의 가치를 통해 국가와 민족의 근간인 가정을 바로 세움에 목적이 있으며 가정이 바로 서야 건전한 사회와 나라가 선다는 유교의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제사를 통해 부모를 잊지 않음이 인간사회의 윤리도덕임을 가르치고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숭조돈종의 정신과 우애를 나누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사는 오래전 무속신앙 시절부터 있었다.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유교이념이 이 땅에 자리 잡은 이후부터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제사를 우상숭배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한 우상이란 단순히 타종교나 조형물이 아닌 내 자신에 스며든 그릇된 신앙적 교만과 배타성임을 알아야한다. 종교의 벽을 넘어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는 편협한 믿음이 우상일 것이다. 종교예식에도 전례형식과 절차가 있듯이 제사를 모시는데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지 나의 종교의식은 받아드리면서 제사전례는 미신으로 생각하는 모순을 범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유교의 우주론에 입각해 설정된 어동육서나 홍동백서의 원리를 모르는 것은 나의 잘못이지 그 전례 자체가 문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유교나 불교에서 가르치는 조상숭배와 효도정신은 기독교의 십계명에 나오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개신교나 다른 여러 종교단체가 상호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열린 자세를 잃게 되면 그 신앙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자신의 가슴을 찌르게 될 것이며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욕보이는 행동일 것이다. 또한 효도정신과 조상숭배의 미풍양속을 꼭 종교적인 개념으로 해석해야만 하는지도 생각해볼 일로 믿어진다.

종교의 전례나 절차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고 있다. 제사의 예절도 꼭 유교형식을 따라야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사의 의미를 명심하면서 변화에 맞게 보완해 나갔으면 좋겠다. 제사는 어디까지나 조상을 기리는 행사이지 나를 기준으로 내가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독실한 불교신자이신 어머님의 제사에 사진 한 장을 달랑 놓고 절도 올리지 않고 알렐루야를 외치며 노래하는 것이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고인의 넋을 불편하게 만들고 가족 전체의 평화와 화목을 가져올 수 없는 제사는 오히려 망자와 생존자들 간의 불화만 가져올 뿐이다.

제사의 전례절차를 바꾸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위선 자식이면 다 균등하게 부모님의 유산을 물러 받는 요즈음 장남이나 아들만이 제사를 모셔야 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빠르게 변하고 있는 현대 물질문명사회에서 종교나 철학과 이념이 다양화 된 가족들끼리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제사전례를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돌아가신 분의 넋을 편히 모시는 태두리 안에서 변화를 모색해야함을 재삼 말해두는 바이다.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도 어려운 한문축문보다는 조상님의 이력과 넋을 기리는 우리말 축문은 가슴에 와 닿을 것으로 느껴진다. 조상님의 사진과 지방, 축문이나 기도문, 그리고 절을 올리는 것과 기도를 겸용하거나 대체하는 것은 효도와 조상숭배의 기본 태두리 안에서 가족들의 화목을 가져올 수 있는 합의점을 찾으면 될 것이다.

<효령대군19대손>

Saturday, November 5, 2011

세가지 은혜 -마쓰시다 고노스게

'

내쇼날電器産業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

松下幸之助 1894 - 1979

"가난, 허약체질, 무학(無學)이 성공의 바탕이었습니다."

일본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 중 한 사람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독특한 경영이념과 탁월한 통찰력 및 국제감각으로 세계시장에서

나쇼날(National), 파나소닉(Panasonic), 테크닉스(Technics), 빅터(Victor) 등의

브랜드를 히트시켰으며
아흔 넷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 산하 570개 기업에
종업원 13만명을 거느린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환경은 불우하여, 일찍이 아버지의 파산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 점포의 점원이 되었고, 밤이면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리는

울보로 지냈습니다.

그런 그가 일본 굴지의 기업 총수가 되었을 때

한 직원이 물어 보았습니다.

"회장님은 어떻게 하여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두셨습니까?”

그러자 마쓰시타 회장은 자신이 세 가지 하늘의 큰 은혜를 입고

태어난 것이 바탕이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세가지 큰 은혜란

1. 가난한 것
2. 허약한 것
3. 못 배운 것

이란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직원은 어안이벙벙하여 “이 세상의 불행을 모두 갖고 태어나셨는데도

오히려 하늘의 은혜라고 하시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하며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마쓰시타 회장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도 일찌기 깨달아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써 지금 90살이 넘었어도 30대의 건강으로 겨울철 냉수마찰을 한다네.

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항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 데에
노력하여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었다네.

불행한 환경은 나를 이 만큼 성장시켜주기 위해
하늘이 준 시련이라고 생각하여 늘 감사하고 있다네."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과 시련을 오히려 하늘이 준 은혜로 생각하고
열심히 스스로 훈련하고 노력한 결과 마쓰시타 회장은
훌륭히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Sunday, October 23, 2011

격물치지[格物致知]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www.yetgle.com/gogu0008.htm

중국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8조목으로 된 내용 중, 처음 두 조목을 가리키는데, 이 말은 본래의 뜻이 밝혀지지 않아 후세에 그 해석을 놓고 여러 학파(學派)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주자학파와 양명학파이다.


주자는 「()」을 이른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모든 사물의 이치(理致)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앎에 이른다(致知)고 하는, 이른바 성즉리설(性卽理說)을 확립하였고, 왕양명은 사람의 참다운 양지(良知)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物欲)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여, 격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풀이한 심즉리설(心卽理說)을 확립하였다.

, 주자의 격물치지가 지식 위주인 것에 반해 왕양명은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고 있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이라 하고,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한다.

주자의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상 만물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 이치를 지니고 있다. 이 이치를 하나씩 하나씩 추구해 들어가면 마침내 확연하게 세상 만물의 표리와 정표 조잡한 것들을 밝혀 낼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격물의 「격()」은 도달한다는 것이니 격물은 즉, 사물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만물이 지닌 이치를 추구하는 궁리(窮理)와도 같은 뜻이라 하겠으며 세상 사물에 이르고 이치의 추궁으로부터 지식을 쌓아올려서 지()를 치()한다는 것이다.


주자에 심취하였던 왕양명은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격물치지의 진수를 실제로 체득해 보려고 하였다. 이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있다는 주자의 말대로 자기 집 둘레에 있는 대나무 숲의 그 무수한 대나무 그루마다 이()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왕양명은 오랫동안의 세심한 관찰 끝에 한 그루씩 대나무를 잘라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로 실험을 아무리 거듭해 보아도 대나무에서는 기대했던 주자의 이()라는 것을 발견하지도 터득할 수도 없었다. 번민한 나머지 왕양명은 병이 들고 말았다. 왕양명은 주자의 학설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으며 드디어는 주자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주자와 달리 그가 생각해낸 격물치지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격물의 물이란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니 사() , 일이다. 일이란 부모를 모시고 섬긴다거나 임금을 받들고 섬긴다거나 하는 것으로 마음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그 이면에 마음이 있으며, 마음의 곁에는 달리 물건이라든가 이치 따위가 없다. 때문에 격물의 격이란 바로잡는다라 해석해야 한다. 일을 바로잡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곧 격물이다. 악을 버리고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사람 마음속에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양심과 지혜를 밝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를 치()한다는 치지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