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21, 2012

전주 이목대와 오목대(梨木臺_梧木臺), 한벽당

이목대와 오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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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대와 오목대(梨木臺_梧木臺)

지정번호 : 전라북도기념물 제 16호
위치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1003

이목대와 오목대는 전주이씨 발상지로서 여러가지 유서를 간직하고 있는 전주의 상징적 역사명소로 되어있다. 경기전의 동남 500m거리에 위치한 곳에 낮으막하게 솟아 펑퍼짐한 언덕받이를 오목대라 하는데 남쪽으로 다소 길쭉이 뻗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타원형의 돈대로서 서남쪽의 언덕 기슭을 벼랑에 이루고 옛 토성 자국이 둘러있다. 동쪽의 승암산에서 뻗어 오목대로 이어지는 산맥을 발산이라 한다. 옛날에는 발산과 오목대는 이어진 산맥이었으나 전라선의 철도 부설로 단절되었다.

오목대는 비록 아담한 산이기는 하지만 다가산과 더불어 전주사람들에게는 가장 친근한 놀이터로 알려져 왔으며 조선 창업의 모든 설화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데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오목대는 고려말 우왕 6년(1380)에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조상인 목조가 살았던 이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으로 유명하며 그후 고종황제가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1900)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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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에서 육교를 건너면 70m 윗쪽으로 천주교의 성지 치명자산이 있는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있는데, 건물이 있는 80m아래쪽에 비석과 비각을 세웠다. 이목대 비각에는 고종의 친필로 새겨진 '목조대왕 구거 유지'라는 비석이 있는데 1900년(광조4년)에 세워진 것이다. 바로 이 도량이 조선태조 이성계의 5대조 목조 이안사의 유허로서 시조 이한때부터 목조에 이르기까지 누대를 이어오는 동안 전주의 토호로서 부성을 누르고 살았던 유적지로, 그러한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나타나 있다. 목조가 당시의 부사와 불화로 이곳에서 강원 삼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만경대의 정몽주 시만 실려있을 뿐 이러한 사적은 실려있지 않다. 다만 설화로 전해질 뿐이다.

전주 - 오목대, 이목대, 한벽당, 한벽굴 view 발행 | 대한민국

철인뼈다귀™ 2011.07.28 11:08
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한벽당은 승암산(僧岩山) 기슭 발산(鉢山) 머리의 절벽을 깎아 터를 만들어 세운 누각이다.
1404년(태종 4)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조선 초기의 문신 최담이 그의 별장으로 지은 것이다. 누각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건평은 7.8평이다. 슬치에서 시작된 상관 계곡의 물이 의암·은석 등 크고 작은 많은 골짜기의 물과 합류하면서 만마(萬馬)·색장(色長) 등 여러 고을 옆을 거쳐 한벽당 아래로 흘러온다. 여기서 물줄기는 계곡의 바윗돌에 부딪쳐 흰 옥처럼 부서지면서 거듭 굽이틀어 남천으로 흘러간다. 옛 문인들은 이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壁玉寒流) 같다고 읊었으며, 한벽청연(寒碧晴煙)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그들이 제영(題詠)한 시가 많이 전해 오고 있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이경전(李慶全)·이경여(李慶與)·이기발(李起渤)·김진상(金鎭商) 등 19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한벽당에서 지었다는 시문이 실려 있어 그 시절의 풍류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처음에는 여기를 최당의 호인 월당(月塘)을 따서 월당루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한벽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寒碧)이라는 어귀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벽당의 서쪽 일대는 자만동(滋滿洞) 또는 주류동(主流洞)이라 불리었다. 옛날에는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가롭게 노닐던 곳이었고, 남원·구례·곡성·순천·진주로 가는 나그네들이 지금의 남천교인 호화로운 오룡교(五龍橋)를 건너면서 그 아름다운 풍치를 감상하던 곳이기도 하다.

주소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15



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한벽당은 승암산(僧岩山) 기슭 발산(鉢山) 머리의 절벽을 깎아 터를 만들어 세운 누각이다. 1404년(태종 4)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조선 초기의 문신 최담이 그의 별장으로 지은 것이다. 누각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건평은 7.8평이다. 슬치에서 시작된 상관 계곡의 물이 의암·은석 등 크고 작은 많은 골짜기의 물과 합류하면서 만마(萬馬)·색장(色長) 등 여러 고을 옆을 거쳐 한벽당 아래로 흘러온다. 여기서 물줄기는 계곡의 바윗돌에 부딪쳐 흰 옥처럼 부서지면서 거듭 굽이틀어 남천으로 흘러간다. 옛 문인들은 이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壁玉寒流) 같다고 읊었으며, 한벽청연(寒碧晴煙)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한벽당사진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그들이 제영(題詠)한 시가 많이 전해 오고 있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이경전(李慶全)·이경여(李慶與)·이기발(李起渤)·김진상(金鎭商) 등 19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한벽당에서 지었다는 시문이 실려 있어 그 시절의 풍류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처음에는 여기를 최당의 호인 월당(月塘)을 따서 월당루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한벽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寒碧)이라는 어귀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벽당의 서쪽 일대는 자만동(滋滿洞) 또는 주류동(主流洞)이라 불리었다. 옛날에는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가롭게 노닐던 곳이었고, 남원·구례·곡성·순천·진주로 가는 나그네들이 지금의 남천교인 호화로운 오룡교(五龍橋)를 건너면서 그 아름다운 풍치를 감상하던 곳이기도 하다.

주소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15
지정번호지방유형문화재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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