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24, 2011

선친에 대한 나의 기억

선친에 관한 나의 기억

선친의 소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시다가 일제 학교 선생이 순사복을 입고서 칼을 차고 서당소년들을 잡아다가 머리를 깎이고 일제교육을 시키는 시대에 선친도 잡혀서 머리를 깎이고 임피소학교을 4년제 소학교를 3년에 마치시고 관비로 전주농업학교을 마치신후 전남 각 오지로 군청 산림계로 발령이 나서 진도, 완도, 장성 (큰누나 출생), 그리고 나의 출생지는 광양 등으로 전전 하시였든 것으로 들었다.

내 가 생후100일이 지나서 관직을 그만두시고 전남 광양에서 현 고향으로 돌아오신 이유는 일제 강점기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을 세우고 조선의 토지을 수탈고저 1920년대 말에 총독부 게시판 에 각자소유 토지을 등록 하도록 총독부게시판에 공고를 했었는데 그 당시 사정으로는 시골에서 신문 보는 사람도 거의 없을 때인데 어떻게 그 소식을 안자는 남의 땅을 자기 앞으로 등록 하면 자기 땅이 되는 세상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안골에 대종중 선산 옆에 채 씨네 선산이 나란히 있었는데 이 채 씨들이 우리선산을 채 씨네 땅으로 등록이 되었으니 우리종중 에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한다. 재판을 걸어서 찾아야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당시 신학문을 한사람은 문중에서 우리 아버지 밖에 없었든 형편이라서 종중에서 소환 령이 내려져서 관직 을 사직 하시고 귀향 하여서 재판해서 안골 선산을 찾았다고 아버지로부터 직접 나에게 전해주셨다. ( 만일 그대로 관직에 머물러 계셨다면 해방 후에 군수정도는 하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동네 雄九 형네도 그런 경우로 밭을 빼긴 경우가 되어서 아버지께서 밭을 찾게 해준 것으로 기억 한다.

창오소학교 (창오국민학교) 가 설립되기 전에는 두형과 누나는 다리실재을 매일 오르고 내리며 십리길 을 통학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주동이 되시여 창오소학교을 서립 하시어서 나는 다행이 다리실재를 넘지 않고 소학교을 다닐 수 있었다. 학교 후원회장 으로 오랜 세월 봉사 하시고 또 종중 에 종회장 으로 헌신 하신 것은 세상 사람이 다인정 하는 일인데 반세기가 지나고 내가 외국에 머물고 있으니 내놓을만한 자료를 없으니 죄송할 따름이오.

내가 소학교 3-4 학년 때 일인데 학교에서 선생님이 일본식으로 창씨개명 하라고 지시가 내려서 아버지 에게 우리는 어떻게 개명해요 여쭈었더니 우리는 창씨개명 않는다고 선생에게 전하 거라 하시였는데 그 당시 어떻게 못한다고 학교에 보고 할 수 없어서 아무 보고를 않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수차 재촉해서 할 수 없이 큰집 작은집 다 구니모도 (國本) 라고 하여 할 수 없이 “구니모도” 라고 보고해서 출석부에 國本 이라고 기록이 된 것을 학교에서 확인 하시고 선생님에 누구 맘대로 창씨개명 했느냐고 호통을 치시어 다시 국본에서 李 가로 원상회복은 되었는데 내가 거짓말 한게 문제가 되어서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부터 크게 혼이 낫고 또 집에서는 아버지로 부터 진통 혼이 난기 억 난다.

그 당시 종중에서 수차 회의를 해서 어떻게 할지 갑론을박 해봤자 결론이 않나 서 각자 알아서 하기로 결론이 낫는데 아버지께서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시고 그대로 성을 유지 하시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든다. 천만다행이도 소학교 6학년 때 (1945 815)에 해방이 되여서 망정이지 해방이 않되였으면 중학교 원서조차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집에서 일본 군가를 부르면 학교에서나 부르고 집에서는 절대 부르지 말라고 야단치신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버지, 형님들께서는 미군이 “오키나와” 을 점령 했으니 곧 조선반도에 상육 하면 우리 조선이 해방 된다고 좋아 하시었는데 이해가 잘 않되였다. 우리나라는 일본인데 왜 일본이 망해 가는데 아버지와 형님들은 기뻐하시는지?

지금 생각 하니 선친께서는 농촌계봉에 앞장 헌신 것으로 생각된다.
묘목을 재배해서 군, 면에 납품 뿐 아니라 산림녹화 에 헌신 하시고 우리 면에서 제일 먼저 고구마를 도입 재배 하여서 우리 산남부락을 고구마 부락이라고 별명이 붙었다.

지경 숙부님께서 생전에 항상 저한테 하신 말씀이 내생 전에 너의 아버지 비(공적비) 을 산남종중 재실 앞에 해 놓으시겠다고 하시였는데 소희재 건물을 못 보시고 세상을 뜨시어서 애석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경숙부님 께서도 세상을 뜨시고 선친의 공적이랄 만한 자료가 손에 없어서 선산에 잇는 묘비문 을 당질 근명 군에게 부탁 하여 번역 하여 여기에 실려 후손들이 읽어서 우리 선조께서 무엇을 남기시고 공헌 하시엿는지을 알리고자 한다.

선친의 비문

公諱平來 號田隱 籍全州李氏 我 太祖高皇帝第三男 諱毅益安大君 之十八代 孫也. 先考諱聖純字元國 妣濟州高氏致一女之第三男.
()의 이름은 평래(平來)이시고 호는 전은(田隱)이시며 전주이씨이시다. 조선 태조 임금의 제3남이신 익안대군 방의(芳毅)18대 후손이시다. 부친은 이름이 성순(聖純)이시었고 자()는 원국(元國)이시었으며, 모친은 제주 고씨인 고치일의 딸이시었다

公一九○一年辛丑正月八日生. 天性剛直 孝親敬長 崇祖敦睦 宗事誠力. 十六代祖考 大林都正 公諱綱 墓所失傳 累年推尋 以遂得考 徵與族人復元 致憤雪怨其恨矣. 日帝時代 恒念抗日 創氏改名終乃拒否 兼行地方敎育 産業發展獻身功勞至大 而 一九七三年 癸丑六月十三日卒壽七十三.
(공은 셋째 아들로서 신축년인 1901년 정월 8일에 태어나 시였고. 천성이 강직하고 부모에게 효성스러웠으며 웃어른을 공경하시였다. 또 조상을 잘 섬기고 일가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며 종친의 일에 열성을 다하시였다. 16대 선조이신. 대림도정 휘강의 묘소가 어디인지 전해지지 않았는데, 공은 여러 해 동안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증거를 확인하고 종중 사람들과 더불어 그 묘소를 복원하시였다. 이로써 종중 사람들의 분함과 원통함을 없애고 한을 풀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의 의지를 늘 지니고 있었으며 창씨개명도 끝까지 거부하시였다. 동시에 지방교육 및 산업의 발전에 헌신하시였는데 그 공로가 지대하시였다. 계축년인1973 6 13일에 73세의 나이로 작고하시였다. )

配崔賢伊 耽津崔東燁女 一八九八戊戌十一月二十五日生. 天性孝而仁 溫而恭 媤母久病 暫不離側 糞尿之除 供藥之節 自任其責. 姑舅所耆必求供進 以盡婦道 鄕薦于孝婦 事載郡誌. 一九五八年甲年 七月十八日卒.
부인은 탐진 최씨인 최동엽의 딸 최현이(崔賢伊)로서 무술년인 1898 11 25일에 태어나셨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마음씨가 따뜻하였으며 또 조신스러웠다. 시어머니가 오랫동안 와병하였는데 그 곁을 지키며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것이라든가 때 맞춰 약을 드리는 것 등을 당연한 자신의 일이라 여겼다. 시부모님들이 좋아하시는 음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서 바치면서 며느리된 도리를 다하시였다. 이에 인근 동리 사람들이 효부(孝婦)로 추천한 바 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군지(郡誌)에 실려 있다. 회갑을 맞던 해인 1958 7 18일에 작고하였다.

祖考諱仲濟 通政大夫中樞府事. 曾祖諱在馨以下三世墓 豊德山壬坐有世阡碑. 高祖諱炳斗 五世祖諱祥植 二世墓 在月谷杞溪副正公靑龍 有碑誌 宗中祔祭行祀矣.
조부 휘 중제(仲濟)는 통정대부로서 중추부사를 역임하시였다. 증조부 휘 재형(在馨)으로부터 13대 선조까지의 묘소는 모두 풍덕산에 임좌하고 있으며 모두를 함께 기리는 세천비가 세워져 있다. 고조부 휘 병두와 5세조 휘 상식의 묘는 월곡의 선영에 모셔져 있다. 월곡의 선영에는 기계부정의 묘소와 그 신도비가 있어 종중에서 함께 제사를 지낸다.
公之伯氏諱貴來 仲氏諱智來 弟京來昌來. 兄友弟恭 庭無間言 友愛甚篤矣.
공의 맏형은 휘 귀래(貴來)시였고 둘째 형은 휘 지래(智來)이시였으며 동생으로 경래(京來)와 창래(昌來)가 있었다. 형들은 자애롭고 아우들은 공손하여 집안에 아무 틈이나 소란이 없었고 서로 우애가 매우 도타웠다.
公生四男二女 長男英九 次南九爀九昇旭 女永春根春. 長男英九 婦耽津崔宗燮女玉蘭 生二男三女. 男喜彬喜潤 女眞玉適平康蔡洙德 次潤淑仁淑.
공은 4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영구(英九)이며 그 아래로 남구(南九), 혁구(爀九), 승욱(昇旭)이 있었으며, 딸로는 영춘(永春)과 근춘(根春)이 있었다.
장남 영구는 탐진 최씨 최종섭의 딸인 최옥란을 아내로 맞아 2 3녀를 두었다. 아들은희빈(喜彬)과 희윤(喜潤)이다. 딸 진옥(眞玉)은 평강 채씨 채수덕과 결혼하였으며, 그 아래로 윤숙(潤淑)과 인숙(仁淑)이 있다.

次男南九 婦南原梁河根女庚英 生一男三女. 男喜千 婦慶州李鳳雨女美淑 生一男根昌. 女連淑 適靑松沈英燮 次女賢淑 適慶州崔時鎭 季女珠美.
차남 남구는 남원 양씨 양하근의 딸인 양경영을 아내로 맞아 1 3녀를 두었다. 아들 희천(喜千)은 경주 이씨 이봉우의 딸인 이미숙을 아내로 맞아 아들 근창(根昌)을 두었다. 장녀 연숙(蓮淑)은 청송 심씨 심영섭과 결혼하였으며, 차녀 현숙(賢淑)은 경주 최씨 최시진과 결혼하였고, 이 외에 막내 딸로 주미(珠美)가 있다

仲男藥學博士爀九 婦義城金鎭悳女順玉 生一男一女 男喜星女珠利.
季男昇旭 婦安東權五幾女爀順 生二男秀勇東恒.
女永春 適道康金煥湜 生三男 長基瀅次基沃保先. 根春 適南原梁悳鎬 生一男石.
裔孫繁衍 不可盡錄
셋째 아들인 약학박사 혁구는 의성 김씨 김진덕의 딸 김순옥을 아내로 맞아 1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희성(喜星)이고 딸은 주리(珠利)이다.
막내 아들 승욱은 안동 권씨 권오기의 딸 권혁순을 아내로 맞아 2남을 두었다. 그 이름은 수용()과 동항(東恒)이다.
딸 영춘은 도강 김씨 김환식과 결혼하여 3남을 두었다. 장남은 기형이며 아래로 기옥과 보선이 있다.
둘째 딸 근춘은 남원 양씨양덕호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밖에 후손들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기록하지 않는다.

有日子女姪 立石穹龜 請文於余 雖老拙文 平素特殊 族親之情誼不可辭而遂爲之銘曰. 惟公擇善固執 擧擧服膺愛國抗日 惇宗和睦 扶綱植倫 敎育産業 終身獻力 莫非哀情 日月爭光永世無窮.
며칠 전 공의 후손들이 비석을 세우고저 내게 비문의 작성을 부탁하였다. 나는 늙고 문장력도 보잘것 없지만 평소 특별히절친하였던 일족의 청인지라 거절하지 못하고 이에 비문을 적는다. 삼가 돌아보건대 공은 선한 일만 택하여 실행에 옮겼으며, 또 이를 마음에 새겨 일거수일투족에 흐트러짐 없이 담아내고자 했다.
나아가 애국과 항일을 실천하고 문중의 일에 솔선하며 일족과 화목하였다. 삼강오륜의 도리를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며 교육과 산업
발전에도 종신토록 힘을 다 바쳤다. 그러니 일생에 충정이 아닌 것이 있었으랴? 그 충정이 해,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툴 것이니 영영 무궁토록 남을 것이다. . .

一九八八年戊辰春二月 日 族弟典校 炳來謹撰
1988년 무진년 춘2
일족의 동생인 전교 병래가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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